인권의 어머니, 고 로자팍스 여사를 그리며…

안녕하세요!
며칠전 인권의 어머니인 로자팍스 여사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팍스 여사를
그리며 글을 씁니다. 또한 요즘 파퓰리즘이라고 정부를 비판하는 척하면서, 국민을
선동에 속는 무식한 민중이라고 무시하며, 자신들만 진정한 엘리트인양 하는 언론
들의 여론을 왜곡시키는 진짜 거짓 선동에 대해서 분노하며 글을 씁니다.

African American 흑인들의 진정한 인권문제가 부각된 것은 남북전쟁 때가
아니라 몇일 전에 사망한 인권의 어머니, 로자팍스 여사가 1950년대 중후반에,
버스에서 백인이 앉는 앞자리에 앉았다가 운전사가 흑인이 앉을 자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흑인석은 꽉 찾으니 서서 가라고 명령하고, 이것을 거부한 팍스 여사를 버스
운전사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구금했고, 여기서 흑인들이 수십마일을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는 버스 보이콧을 하면서 버스에서의 좌석구별을 철폐한 운동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미국의 주류인 코커시안들이 시혜적으로 인권차별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흑인들이
인권운동을 해서 얻어낸 차별금지란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승만 독재라고
하고 있을 때조차 미국은 백인 레스토랑, 백인 화장실, 백인 좌석, 백인 호텔이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 Dr.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민권운동과 보수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시작된
히피문화, 우즈스탁으로 유명한 히피들의 락축제, 존 케리 전 미국 대통령후보 등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훈장을 떼어서 공개적으로 버리는
(포레스트 검프의 반전 시위기억 하시죠?) 등 반전 운동, 그리고 보수층인 레이건
주지사(후에 1980년대를 이끈 레이건 대통령이죠)가 경찰에 발포명령을 내려 수십명
이 사망한 사건 등 저항운동으로 인권향상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인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기 전 불과 십몇년 전에
시위대에 발포명령을 내려 수십명의 사망자를 낸 것은 모르고, 전 주미대사인
홍석현씨는 마치 훌륭한 레이건 대통령이 왜 광주시민을 희생시킨 전두환 대통령
을 초대해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오해를 받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니까, 이상향의 나라이고, 한국이
1960년대 군사독재를 했어도, 우리만의 특이한 독재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1960년대는 저렇게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시민 발포명령자인 레이건
이 대통령이 되고, 그가 훌륭한 사람으로 남아 있는 미국과 최소한 인권탄압자로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을 기억하는 우리중 누가 더 민주화가 되어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미국 사람들이 훌륭해서 인권을 보호해 주었다구요? 천만에요. 수많은 흑인들과
소수자들이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얻어낸 인권입니다. 왜냐하면 로자 팍스 여사의
버스 보이콧 운동을 필두로 연방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남부 등의
옛 노예주들은 여전히 백인 호텔과 백인 레스토랑을 운영했으니까요. 참고로,
연방법은 국가 등 공공기관, 공립학교나 각주 사이에 벌어진 주간통상에 대해서만
적용이 되기 때문에 주에서 민간기관인 레스토랑을 차별적으로 운영해도 이 법에
위반되지 않았거든요.

이후, 1960년대 인권운동의 확산으로, 연방대법원이 법의 해석을 통해서, 다른
주에 사는 사람이 차별주의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차별을 받는 것도, 주간통상에
해당된다고 결정을 했기 때문에 그제서야 백인전용 어쩌고 하는 말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 최근의 카트리나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60%가 넘는 흑인들이
사는 뉴올리언즈주의 빈곤층 비율이 미국에서 제일 높고, 다른 주의 경우에도,
흑인들의 비율과 빈곤층의 비율이 거의 일치하는 점을 보면 여전히 미국은 감추
어진 보이지 않는 차별이 진행되고 있는 나라입니다.

기본권 규정에 의해서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고, 상업규정(commercial)에 의해
인권을 보호하는 미국의 본 모습입니다. 한국교포들은 흑인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최소한 미국 시민권자 자녀를 둔 교포들은 흑인들에 감사를 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속지주의로 미국의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은 어떤 법률의 규정
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바로 남북전쟁의 결과 수정된 헌법규정을 통해 흑인노예
를 해방하면서, 편법으로 미국에서 태어난 노예의 후손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
한 것입니다. 그 혜택을 지금 영주권만 지닌 교포들의 자녀들이 시민권자가 되면
서 받고 있는 것입니다. 흑인을 무시하고 미국은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운영이
되는 나라라고 하는 말들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표현인지 교포들은 알아야 합니다.

흑인 대법관은 있지만 부인이 백인이고, 흑인에 대한 사형판결에 100% 찬성을
하는 사람도 그 흑인 대법관입니다. 물론 소수인종 출신 장관 등 고위직도 많습
니다. 그러나 히스패닉 출신 법무장관이 택사스주의 법무책임자로 있을 때,
테러혐의자들은 국적이 없기 때문에(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출신 테러범의 국적
은 테러리스트가 되면서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국가간의 협정인 포로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소수자 출신의 엘리트로 주류
대우를 받으면서 그 컴플렉스가 결국 소수자 탄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신보수주의, 신자유주의의 극치입니다. 노벨경제학상을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극치인 게임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비행기 테러사건의 경우
인질범을 모두 희생시키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협상하지 말라는게 바로 게임
이론이라는 것이고, 신자유주의입니다. 소수의 생명은 희생시켜도 된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아직 소수자에 대한 인권차별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게임이론 중엔 진짜 마초에겐 아무도 당할 수 없다는 것도 있다지요.
진짜 미친짓 하는 사람에겐 어쩔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더 많이 미친
사람이 이긴다는 것이 게임이론이고, 신자유주의입니다. 이스라엘이 헌법으로
비행기 테러범과는 협상하지 못하도록 해 놓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비행기
테러를 받지 않는다고 하는 기사를 쓴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럼 몇해전 미국
에서 일어난 사건 처럼 아예 협상을 원하지 않는 테러범은 어쩌냐구요? 신자유
주의의 한계입니다. 참고로 이스라엘이 다른 형태의 테러는 가장 많이 당하는
것은 게임이론이 또 어떻게 설명을 할 건가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국제법상 국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본국에서 추방되고, 신
국적은 받지 못한 터미널맨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는 있습니다. 더나아가서
포로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정이나, 각종 UN인권 조약들은 국적가진 사람을 상
대로 적용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인간’에게 적용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백번양보해서 국제법이 국적이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해도, 테러리스트
중에 국적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네바 협정의 해석상 테러리스트라고 해도
교전시에 무기를 들고 특정한 표시 혹은 동일한 저항의사를 가진 사람의 행위
라면 협정상의 포로로 인정되어 정당한 대우를 받아 처벌되도록 합니다.

미국법은 국제법을 이유로 해서 미국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따라서 로스쿨에서도 국제법은 대부분이 배우지 않습니다. 소송의
대상이 아닌 것을 그 직업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소홀히 다룰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미국 명문 로스쿨을 나온 미국 변호사들도 한국과의 협상과정에서
엉뚱한 얘길 많이 합니다. 미국은 변호사의 언변으로 배심원을 조종해서 주의
법까지도 바꿀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국 변호사가 늘 원칙인 법에
의해서 얘기한다고 생각하시면 잘못입니다.

참고로 국제법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국적 없는 사람
이 없고, 테러리스트도 포로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정의 보호대상이 된다는
것을 미국 변호사들은 제대로 배우지 않기 때문에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UN의 각종 인권조약들은 권고규정이어서 어겨도 아무런 제제규정이
없습니다. 따라서 테러리스트를 포로로 대우하지 않더라도, 미국법에 위반이
안되면 괜찮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미국 신자유주의만 비난하고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이런 엉터리
국제법 해석을 한 사람이 미국 정부에 근무했던 한국인 교수란 것입니다. 극우
주의자는 통하는 법이니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반미만 주장해서는 안되는 것은 이러한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에 맞서서 노예해방운동을 하고, 민권운동을 한 수많은 미국 시민들
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나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행사하는 행동들이
나쁜 것이지, 미국 사람들이 전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미국병사들이 잘못을
한게 아닌데, 왜 미군부대에 가서 미국병사를 미워합니까? 그들도 결국 희생자
입니다. 우리나라의 극렬한 진보주의자들이 반성해야 하는 일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설사 그 사람이 잘못된 의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을 미워
할 것이 아니라, 그 나쁜 의견을 고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강정구 교수의
이념이 밉다고, 괘씸하다고 구속해야 한다는 보수주의의 주장이 불구속 수사원
칙이라는 우리 법제도에 어긋나 잘못된 것이듯이, 맥아더 장군의 이념이 밉다고,
괘씸하다고 동상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극렬 진보주의자의 주장이 공용물손괴를
금지한 우리 법제도에 어긋나는 잘못된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에 사로잡혀 행동할 것이 아니라, 정말 인간을
사랑하고, 소수를 희생해서 라도 얻어야 하는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그러나
실은 기득권 층의 절대 행복과 일반의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전체주의적 성향
에서 벗어나서, 소수, 하나의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하는, 진짜 인권을 소중히
하는 인간주의에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소수의 인권을 보살핀다고, 전체 다수의 인권이 희생되어서야 되겠느냐고 말씀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전체주의의 추종자임을 숨기며, 혹은 권위주의에 빠져
살고 있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소수와 다수가 왜
뺏고 빼앗기는 게임을, 대결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소수의 인권 보호
해 준다고, 다수의 행복이 희생되는 것이 아닙니다. 법제도에 따라 보호하고,
규제하면 됩니다.

나쁜 의견을 가진 사람을 구속할 일이 아니라 논리적인 토론으로 나쁜 의견을
고쳐주어야지요. 논리적인 토론이 일반화가 되면 사람을 미워하거나 싸울 일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서로 이념이 다를 경우 인간의 행복이란 개념의 정의를
달리 하기 때문에 견해가 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거로 다수결로
결정을 하면 됩니다. 지금 시대는 이것이 인간의 행복이다라고 선거로 결정하고,
그 선거에 뽑힌 사람이 그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념이 다른 것을 마치 사람이 나쁜 것처럼 서로 미워하고, 상대방의
주장이 공론화가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도 할 것처럼 구속시키거나 동상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음모론과 기세잡기 식, 어찌보면 유치한 신혼부부의 경제
권싸움, 기세잡기 싸움 처럼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나비이론을 맹신한 나머지, 기후가 변화가 무서운 것이니, 아예
아마존의 나비를 다 죽여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국민에게 인기를 얻거나, 국민을 상대로 한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면서 구속시키자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국민이 현명해지면 되는 것입니다. 국민이 거짓과 진실을 판단할 수 있도록,
국민이 독재의 권위, 보수주의의 권위, 공산체제의 권위, 진보의 권위에서
이념에서 떠나서 진실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면 됩니다.
논리적인 토론을 활성화하고, 국민들이 어려서 부터 토론과 자유로운 발표를
하도록 하면서, 학생들에게 공부만 하라고 과중한 수업부담을 주어서, 비판하지
못하도록 하는 교육제도를 유지시켜서는 안됩니다.

엘리트 자기들만 똑똑하니, 무식한 국민들은 그 권위인 엘리트의 교육내용만
달달 외고, 따라오라는 오만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예산탓만 하면서 미국의 가난한 초등학교에서 다 하는 논리적 토론과 발표를
우리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전부 이런 소수 엘리트주의에
있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국민이 좀더 논리적이어야 한다고 하면, 잘난체
한다고, 국민을 무식하게 여기고 가르칠 대상으로 생각한다고 비난을 하는
우리의 잘못을 알아야 합니다. 소수의 엘리트주의자들이 파퓰리즘이라고 말하는
것을 새로운 인기단어를 알았다는 냥 국민들이 따라서 파퓰리즘이라고 비난해서
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파퓰리즘이란 무식한 국민들을 선동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국민 자신을 무식하다고 하면서 상대방을 파퓰리즘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을, 국민들이 용어를 몰라서, 엘리트들의 언변에 속아서 국민 자신을 무식
하다고 하는 사람을 따라해서야 되겠습니까? 파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당신은
국민 아닙니까? 아니면 상대방 이념을 가진 사람은 무식하고, 엘리트를 지지하면
당신은 유식한 엘리트가 됩니까?

어느 누구도 파퓰리즘이라고 비난할 수 없을 만큼 우리 국민들은 절대로 무능하
거나 무식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때 졸부 기득권 양반은 다 도망가도, 일반
민중은 뜻있는 선비 혹은 민중의 대표인 의병장들을 따라 의병운동을 했습니다.
동학혁명이 또한 그랬고, 3.1운동이 또한 그랬습니다. 4.19와 유신말기 마산항쟁,
5.18, 그리고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국민 스스로 인권을 지키기 위해 파퓰리즘
의 선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 스스로가 저항을 했었습니다.

국민이 논리적인 비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일제 식민지, 그리고, 수십년간의
독재, 군사독재, 민주적 권위주의의 지배를 받아오며, 발표와 토론교육이 실시
되지 못했기 때문이지, 언어교육과 논리교육을 제대로 받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지
국민이 무식하고, 공부를 안해서 한글 독해도 못하고, 각종 영어시험의 평균점수
가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못난 부모, 못난 선생은 있어도 못난 자식, 못난
제자는 없는 법이니까요.

자기가 공부 안해서 그런거지 라는 말속에, 파퓰리즘이라고 비판하는 그 속에
자신은 공부 열심히 했고, 자기는 똑똑한 엘리트이니 무식한 시민들은 자기
그릇이나 챙기고 있으라는 오만한 엘리트주의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왜 이념
속에서 속아살아야만 합니다.

보수 비판한다고 진보가 아닙니다. 보수나 진보나 논리적인 토론으로 합리적인
문제의 해결을 하지 않고, 구속이나 동상 무너뜨리기 같은 비논리적인 폭력행사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잘못입니다. 양비론이나 양시론의 잘못은 바로 이렇게
비논리적인 문제 해결을 옹호하거나,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명해 져야 합니다. 평생 공부해야 합니다. 남탓하면서 이념속에서
살고, 권위있는 지도자들의 얘기만 듣고, 언론기사만 추종하면서 자기의 독서는
하지 않는 파퓰리즘이라고 모욕당해도 자기 욕하는 줄 모르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요즘 언론기사를 보면 언론이 국민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파퓰리즘 등을 이유로 공격하는 성격의 기사가 더욱 그렇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인용표시 ” “, ”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무식한 국민들이 독해력이 없다고 하니까
기자가 ” “,”로 강조한 부분만 읽으라면서, 감정적이거나 인상적 비평, 특히 자극적
인 어휘의 사용에 강조의 의미로 “”,”를 쓰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선동(propaganda)
이고 정치적 전술이 포함된 것입니다. 인용표시를 강조의 표시로 쓰면서 기사마저
앞뒤 떼고, 기자가 강조해준 부분만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합시다. 학생만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이상 소수 엘리트주의자
에 속지말고, 언론 기득권에 속지 말아요. 이그.. 글이 너무 심각해져 버렸네요.
요즘 분위기에 감정이 격해서 너무 딱딱한 글이 되어 버렸네요. 죄송해요!

그럼, 안녕히 계셔요!
최재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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