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시민의 각성과 사회통합

<민주주의 시민의 각성과 사회통합>

-참고: 여기서 민주주의란 모든 정보가 주어진(informed) 시민들의 토론에 의한 논리적 결정, 그리고 양자가 모두 옳은 경우 즉, 정책의 결정은 선거 혹은 다수결에 의해 투표로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정보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폭넓은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며, 일본, 우리나라 등 권위주의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는 명예훼손을 형사처벌하지 않으면 민사문제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어가 언어순화론에 빠져 신용어의 창설을 꺼리고 과거 용어의 합성으로 복합명사로 사용하려는 것은 변방 농경민족이 암기 가능한 능력으로 주입식 외래문화 수입과 권위주의에 의한 권위유지책으로서 사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법률문화에도 이 특성이 반영되어 실용적으로 이해관계 재조정을 하지 못하고 자꾸만 과거에 있었던 다른 법리나 조항들의 유추적용(그러나 논리학상 유추적용이 아님, 근거 없는 논리비약의 적용이고 무비판적인 해석론임) 하는 것도 그 특성의 하나이다.

과거이론에서만 근거를 연결시키고 새로운 논리적 합리적 근거 하에 새로운 이해관계를 결정하여 입법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입법부는 약해지고 행정부나 행정부 수반에 과도한 권한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입법부가 실용적으로 새로운 합리적 논리적 근거를 가진 입법을 하도록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검사 등 권위주의자들이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연구하고 소통하는 전문인들이 국회에 진출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 반복은 농경민족의 특징일 뿐 고도의 산업사회 혹은 유목민족의 문화에선 적용 불가능한 얘기이다. 역사만을 바라보는 것은 농경민족의 인간의 특성에 기인할 뿐, 주관적 판단에만 머물게 되는 본능적 판단만 하게 되는 단점이 있게 된다. 정책결정 등 이해관계가 걸려있거나 공익을 위한 자기이해의 양보 등 정치적 판단이나 합리적 논리적 판단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동북아 권위주의 국가들에서 인권과 함께하는 법치주의, 토론이 가능한 민주주의는 자리 잡기 힘이 들것이다.

심지어 싱가포르의 지도자들은 서구의 합리주의 혹은 자유토론 문화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동양의 권위적 문화를 얘기하고, 일본의 경우에도 베스트셀러 책이었던 국가의 품격 등을 보면 지나친 일반화를 하면서 이라크전만을 이유로 미국의 모든 문화를 거부하고, 당연히 논리적 토론문화도 품격이 낮은 것이라는 논리비약을 한다. 이러한 잘못된 동양우위론이 바로 민주주의 시민 각성에 필수적인 합리적 토론문화가 자리 잡을 수 없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양의 권위주의적 문화에서의 처세술에 맞는 인간형은 결과적으로 객관적인 검증 등 숲을 보지 못하고, 개인의 주관이나 감정, 혹은 기분대로의 특정한 개개 나무만 보게 되는 것이다. 합리를 보지 못하고 경험에만 위존. 책 등 증명된 학설, 혹은 잠정적 진실을 낯설어하고 평생 학습은 남의 얘기이고, 기존의 권위, 지식으로만 살아가려 한다. 물론 뇌과학의 연구결과를 보면, 학습 혹은 독서하지 않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30대를 넘으면 완전히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억력은 사라지고, 기존의 정보를 조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한다. 모든 문제를 범주화하고, 자기의 기존 비판의 체계 속에 집어넣어 기존의 공격방법으로 문제를 접근한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새로 생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단점이 생기는 것이다.

반대로 서구의 합리주의 문화는 숲만 보고 개별적인 인간은 보지 못하므로, 냉정하고 차가운 정책들을 내어 놓게 된다. 동서양 문화는 장점과 단점이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서양의 학자들은 서로의 차이점을 연구하지 않으니 알 수 없는 것이고, 동양의 학자들은 서양만을 쫓고 있으니 서로의 차이점을 전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새로운 얘길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하며 과거의 자기 과거 경험중의 무엇인가와 비슷하다고 거짓말을 해야만 교육학적으로 이해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는 독서 등 평생학습을 통한 합리적, 논리적, 잠정적 진실을 익히고 자기의 본능적 주관적 기분대로의 주장이 옳은지 항상 자기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원래 인간의 한계를 알고 그 스스로의 주관이 틀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을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거나 권위주의 국가의 약육강식 순위를 결정짓는 유일한 잣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경쟁을 좋아한다는 사람일수록 실은 경쟁을 싫어해 강자그룹은 한 번 실수로 왕따, 가십문화로 약자를 경쟁상대에서 원천 배제시키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실패내성을 강화해 학습된 무기력증(좌절)에 빠진 약자를 양산시킨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 시민이라면 부활전이 없는 패배자가 되는 것임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은 파산을 해도 변호사, 의사 등 전문자격증을 상실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10년에 한번만 파산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다시 신용도가 높아지는 이점도 있다고 한다. 우리도 평생패자부활전을 가능하게 하는 파산제도의 개혁이나 각종 공무원 임용제, 다양한 연령의 고용문화 등을 가능하게 해야 할 것이다.

명예훼손죄 형사처벌과 왕따문화로 권위주의 유지하려 하지 말고 소통과 솔직함으로 신뢰를 얻으려 해야 한다. 합리적 논리적 근거가 있으며 권위주의와 싸워 이길 수 있고 역사에 없던 새로운 발명도 할 수 있다. 승리할 수 있다.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한계나 잘못을 보충하고 메워나간다면 숲과 나무를 고루 살펴볼 수 있는 민주 시민으로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비교하여 생각해야 한다. 의견이나 정책 등에서 다른 것은 왜 다른지 이유를 들어보고 최소한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줄 새로운 해답일 수도 있으므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여 다양한 의견이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

단정적인 표현은 자신감의 표시이다. 공적기관, 유권해석기관이 아닌 표현의 자유를 지닌 사인 간에 틀린 말 허위 정보에 지나친 비난을 가하고 매장시키는 것은 명예훼손죄 처벌과 아울러 시민 민주주의의 장의 토대인 언론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고 인류발전의 토대인 창의를 짓밟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틀린 것을 알았으면 사과하면 될 뿐이고, 틀린 의견을 모아 옳은 의견으로 나아가거나 의견의 차이를 좁혀가 통합의 여지를 키우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즉, 자신감 있게 표현하며, 창의의 바탕을 폭넓게 하고, 틀림에 대한 비난을 줄여야 한다. 사회통합을 원활히 하며 의견의 차이를 좁히는데 윤활유적인 의견접근을 용이하게 하여야 진정한 사회 통합이 가능할 것이다.

P.S. 트위터(http://www.twitter.com/sarochoi)가 생긴 이후에 긴 글을 쓰기보단 단문에 더 익숙해 졌네요. 물론 그 전에 개인적으로 공부한 것보다 표현한 것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구요. 즉, 공부부족 상태가 계속되었고요. 한국에서 로스쿨에 다시 입학해 학생생활을 하게 되어서 바쁜 탓도 조금 있고요. 이제 개인적으로 받은 충격도 잦아들고 있어 조금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사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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