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사회에서 시민신뢰의 사회로, 권위에서 평등, 약육강식에서 약자배려로.

이번 학기 마지막 시험을 치루고 간만에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이란 영화를 IPTV에서 봤어요. No.라는 말. 시민들이 아니에요.라는 말을 하는 순간이 인간의 다음 진화의 시작이 아닐까 싶어요.

흔히 진화라고 하면, 인간이 그 정점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인간은 진화의 마지막 모습일까요? 성인군자들은 후대가 자신을 닮길 바라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도 아직 진화중에 있거나 잠시 진화를 멈추고 있는게 아닐까요? 다음 진화의 단계는 어떠해야 할까요?

저는 과담, 포퓰리즘 운운하거나 엘리트즘 자체가 잘못된 권우주의란 생각이 듭니다. 혹성탈출에서 유인원들이 똑똑해지는 것을 싫어하는 인간의 모습과 같은 것이겠지요. 통제력이 없는 시민이 힘을 가지면 어떻게 되나. 통제력이 없는 제3세계가 미국을 뛰어넘는 강대국이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들 말이지요.

한번 잘못되면 걷잡을 수 없다는 생각, 시행착오보다는 안전한 길, 점진적인 길이 좋다는 생각.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요? 틀리면 실험을 거쳐 고치고, 다시 고치고 하면서 발전해 가야 하는 게 아닐까요?

구극의 진실을 모른다고 해서 허무주의로 빠지기 보다, 또는 이를 악용해서 거짓말로 세력싸움만을 할 것이 아니라 잠정적 진실부터 하나씩 만들어가고 다시 이를 바꿔나가는 철저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시민들이 설사 잘못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No!” 그건 아니에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우선 필요한게 아닐까 해요. 시민들 스스로 잘못을 얼마든지 고쳐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가끔 집안의 부부싸움처롬, 사회의 이념, 세력싸움도 결국 큰 그림아래에서 보면, 서로 허수아비를 내세워, 허상의 절대진실을 내세우고, 거기서 밀리면 모두 밀린다는 생각에 서로 틀린 얘기를 엉뚱한 대상을 두고 싸우고 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목적은 사라지고, 마음속 두려움이나 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라지고 그냥 전선이 형성된 시점에, 사안에 사로잡혀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에 사로잡히는 것이지요. 정작 이해관계를 드러내 놓고 그걸 조정하는게 옳은데 옳은 명북싸움, 후면의 도덕성 싸움에 사로잡혀 사람에 갖히고, 다시 얘기는 제자리를 돌게 되는 것이지요.

왜 권위를 가지고 힘으로, 약육강식의 자기들만의 규칙에 따라서 시행착오조차도 못하게 하는 걸까요? 실패를 왜 싫어할까요? 왜 패자부활의 기회를 사회에선 주지 않는 걸까요?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는 가정은 경제학 연구방법의 전제이지만, 그건 경제학 연구자들이 스스로 그어놓은 한계일 뿐이죠. 이걸 깨면, 즉, 사람들이 재화를 나누고, 그 전제 밖에 나가서 제3의 대체재를 끊임없이 찾아내면 경제학적 접근방법은 모두 틀린게 되지요.

서양학문은 연구의 방법과 한계란게 분명하죠. 그 외에는 모른다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모든 학문의 구극에 도달하면 이런 학문의 존재이유인 연구방법상 전재나 한계 자체를 깨어버리면 돌파가 가능하지요. 오일 경제는 제3대체에너지 개발과 동시에 무너지듯 말이죠.

결과적으로 엘리트즘이나 잘못된 권위주의의 방식, 즉 카리스마 갖춘 선지자, 영웅을 찾아서 그가 사회통제를 유지하면서 절대로 실패하지 않고 시행착오없이 옳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지요. 잘못이 있어도 반성하고 고치며 되는 것이지 학자의 길, 발언권을 영원히 잃는 것은 아니란 거죠. 넌 이제 끝이야..가 아니라 영원란 패자부활전이 있는 것이지요.

주류나 비주류에서 주류라고 자처하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싫어하지요. 농경사회에선 늘 반복되는 농경작업 탓에 연장자가, 경험많은 자가 항상 옳았지요. 그러나 유목사회에서도 그랬을까요? 지금은 과거의 경험이 반복되는 걸까요? 아니면 모두 변화하고 있나요?

패러다임의 변화(shift of paradigm)런 과거의 이론체계로 완벽하 설명되는 것도 이론체계가 변해감에 따라 틀린 얘기가 된다는 것을 말하지요. 그러니 한, 두가지의 근거만으로 자기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 해선 안되지요.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각자의 패러다임으로 각자 다 옳다는 것, 너와 나의 이견을 힘으로 조정할 약육강식 혹은 권위주의란 없다는 것, 연장자 우선, 가부장제 따위는 없다는 것이 평등이지요.

그러나 평등이라고 해서 정말 모두가 다른 생각을 하고 다 옳은 걸까요? 풍부한 근거를 가진것과 자기 생각만 그런것의 차이가 있지요. 잠정적 진실과 주관적 안상평가가 다른 것이듯 말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서로 인정받으려고 하고, 자기 말은 무조거 믿더주거나 동의, 공감해주길 바라지요. 마초주의자들일수록 더 심하겠지요. 뭔가 서열이 있어야 편한것 아니냐, 불신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엉뚱한 지도자가 나와서 국가가 망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두려움이 있지요. 책임정치와 선거르 롱한 정권교체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의 자세이지요. 여야 지지자들 모두 같지요.

잘못이 있으며 바꾸면 되고, 이렇게 해보고 안되면 다르게 해보며 되는 것이지요.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된다고 하는 마음으론 도저히 패러다임이 변하는, 기존 이론체계가 변하는 상황에 맞설수가 없지요.

불신의 사회에서 신뢰의 사회로, 우리가 서로 믿어주고, 설사 틀린 주장이 있더라도 하나씩 설득해가며, 알려가며, 끊임없이 주권자인 시민을 하나씩 하나씩 설득해가며 잘못을 고쳐가는게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영웅, 지도자,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을게 아니라 주권자인 시민이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진화하고 당당하게 “No!”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 시작하자구요. 틀렸다면 또 이렇게 고쳐가면 되니까요.

괴담, 포퓰리즘 윤운하며 시행착오를 두려워해 권위주의에 기댈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주권자인 시민들 스스로가 서로 믿고 관료제도, 대의정치제도를 견제해 가야하는게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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