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개혁에의 바람

보스턴어학연수

안녕하세요!
여기 보스턴은 낮에는 반팔로 다녀도 괜찮을 정도지만, 아침 저녁으론 코트를
입어야만 할 정도로 차가워 졌어요. 보스턴 레드삭스는 지난 89년동안 2번 우승
했는데 제가 그 두번을 다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운인지 몰라요.

요즘은 기초 교육에 관해서 관심이 많아졌어요. 어차피 교육학도 과학적인 학문
이고, 실험결과가 나왔으면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자세라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실험결과를 무시하고, 그래도 옛날 것이 무조건
좋다라는 경험적 고집을 계속 부리는 것이 우리 교육계 현실이구요.

선생님은 그냥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에 그치거나 정말 궁금해서 아이
들이 질문하는 것에 안내를 해 주는 역할로 친구처럼 다가가는 것이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권위로 끌고 가려 하거나, 주의집중력이 떨어진다고 지나치게 쉽게
ADHD주의력 결핍아동으로 판단해 버리거나, 말도 안되는 질문은 없는데, 시간이
부족하다고 학원에서 다 배워왔다고 간주하고 쉽게 아이들을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은 아이들이 호기심을 죽이고, 창의력을 짓밟는 교육이란 것이 60년대 진보적인
교육학자인 홀트 교수의 주장이죠.

미국도 물론 아직까지 69년 발표된 홀트 박사의 주장을 전면 수용하진 않고 있지만,
필드트립을 통해서 사회현장(도서관, 과학박물관의 실험실습장 활용)에서 학습을
하거나, 아이들이 흥미있어하는 과제만 공부하게 한다든지 등등으로 부분 수용이
되고 있는 주장이에요.

교과서속의 죽어있는 인물이 아니라, 실제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이들이
호기심을 가지기 때문에 학부모를 초청하거나 소방수 아저씨, 변호사 등등 직업인을
초청해 아이들이 질문할 시간을 가지는 것도 시행되고 있는 것들이에요.

아무래도 부모가 자식을 걱정해서, 시행착오를 겪지 않게 하려고 사랑이 담긴 잔소
리를 하거나, 선생님이 아이들이 엉뚱한 곳에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딱 정해진
것만 정답을 적어주고, 노트도 깨끗하게 작성하도록 심지어 연필잡는 법까지 지적
해주는 것은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믿어요.

그렇지만 인간은 실수를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배울때, 혹은 교육학적인 표현으로는
흥미를 가지고 배울 때 가장 잘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지나친 간섭이 된다고
해요. 노트 좀 지저분하게 관리했다고, 책에 색색깔로 깔끔하게 줄 긋지 못했다고
야단쳐가면서 관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이해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실제로 깔끔한 노트보단, 그림이나 화살표 등을 활용한 내용을 보여주는 듯한 노트가
훨씬 기억을 되살리고, 이해를 쉽게하는데 효율적이라고 합니다.

체벌문제도 마찬가지에요. 심리학 실험 결과 어떠한 처벌도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하지는 못한다고 해요. 마치 갓난 아이가 울때 야단친다고 울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란
거죠. 대신 긍정적인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고, 잘 하면 보상을
해 주되, 임의적으로 보상을 줘서 일상적인 보상에 식상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쁜 짓 하는 것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래요.

체벌을 하거나 야단을 치게되면, 아이들은 나쁜 짓을 숨기려는 것을 배울 뿐, 혹은
나쁜 짓을 숨기기 위해 상대방에 주의를 기울일 뿐, 마음속에서부터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요.

그래서 미국의 교육적인 동부나 서부 해안지대 주의 경우에는(주민의 고교 졸업
율이 50%를 넘는 주들) 체벌이 불법으로 규정되고 일체의 처벌이 금지가 됩니다.
사랑의 매란 것은 심리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죠. 물론 미국도 주민들의
고교 졸업율이 45%미만인 곳으로 과학적인 실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곳들인
보수적인 남부지방은 체벌이 불법이 되진 않아요.

우리는 일제시절부터 그런 체벌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관행이라고 생각하고, 아이
들을 잘 다루기 위해 필요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교육적인 효과는 없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어 있어요.

리더쉽이라는 용어도 지도력이란 용어와는 전혀 달라요. 학생들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리더쉽인데, 일본식 번역에 따라서 선생님이 학생을
끌어가 줘야 한다는 선입견이 생기게 되잖아요. 독재에 순응하듯이 말이죠.

이 외에도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60년대 미국에서 개발된 IQ중심의 지능검사
는 한 개인의 학습능력과는 무관하다고 해요. 다중지능 이론이 주류이고, 최근엔
식물이나 동물을 세밀하게 잘 분류하는 지능도 추가되고 있다고 하네요. 즉,
기존의 IQ에 해당하는 수학적 능력고 어문적 능력에 더해서, 음악, 미술, 체육,
상대방의 감정을 잘 이해하는 능력, 자기의 감정을 잘 이해하는 능력, 그리고
감성능력 등등 다양한 지능이 존재한다고 해요.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책을 그대로 암기해 말하는 것은 최하점수를 받아요.
왜냐하면 암기해 그대로 말한다는 것은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자기말로 소화해서 책과는 다른 표현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죠. 그래서 책에 있는
그대로 답을 고르는 방식의 시험은 없어요. 얼마나 다양한 표현으로 바꾸어서
말할 수 있느냐를 살펴보죠. 시험은 이해도를 측정하는 것이지 얼마나 외우고
있냐를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미국에는 0세부터해서 남자아이, 여자아이에 따른 육아법과 부모가 대화하는
방법, 놀아주는 방법 등등 수많은 책들이 나와 있어요. 세분화되어 있어서 각
연령별로 다른 책을 봐야 해요. 모두가 실험으로 검증된 것이니까 입소문이나
학부모의 검증되지 않은 속설을 담은 한국식 육아책이나 교육책과는 전혀
다르지요.

가령, 여자아이들은 부모들이 직장에 데려가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선생님, 간호사 등등 아이들의 상상속의 제한된 직업의 폭을 넓혀 주는 것이
좋다고 해요. 정치인, 변호사, 과학자 등등 경험이 상상을 자극하고, 성취동기를
부여해 주니까 알파 걸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반면, 아직 남자아이들에 관한 연구는 초기단계라고 해요. 한마디로 남자아이,
여자아이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교육방법은 없다고 해요. 호르몬의 작용이
전혀 다르게 되기 때문이래요. 남자아이들은 공격성이나 충동성을 조절하는
작용을 하는 세로토닌이란 물질이 여자아이에 비해 매우 부족하데요. 남성
호르몬의 작용때문이래요.

갓난 아기의 경우에도 태아시기에 남성 호르몬에 많이 노출된 아이들은 불편
함을 울어버리는 것으로 해소를 한데요. 남성 호르몬에 적게 노출된 아이들은
엄지 손가락을 물어서 불만족을 스스로 해소할 줄 알게 된다고 해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남자아이들의 6-70%는 울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향이 크겠지요.
불안한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이나 충동성을 억제하는 세로토닌이 부족
하기 때문이래요.

세로토닌은 수면중에 분비가 되는데, 태양의 일조량과 연관성이 있데요. 아침
부터 낮까지 태양을 많이 봐야 생채시계가 정상작동을 하고, 그래야 밤에 숙면
을 취하면서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가 된데요. 그런데 남자들은 안그래도 여자
에 비해 절대량이 부족한데, 가을이 되면 일조량이 줄어들어서 호르몬 분비가
줄어들게 되므로 남자들이 쉽게 우울해진다고 그래요. 가을남자란 말도 있잖
아요..

문제는 이 세로토닌이 신경전달물질이라는 거죠. 즉, 반도체에 전기가 통하게
해주는 작용과 같아서 뇌세포간의 신호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데요. 따라서
이 호르몬이 부족한 남자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당연히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지도 못한데요. 자기의 문제점을 모르니까
불편해도 선생님이나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주의집중이 안되고 학교에서 겉돌게 되는 것이구요. 아니면 공격적으로 행동
하거나 하죠.

그래서 남자아이들을 위해서는 부모나 선생님이 추측으로 대화를 거는 적극
적인 듣기를 해야만 한데요. 아이들이 불편해 보이면 말을 안해도 적극적으로
너 이래서 그러는 거니? 아니면 저래서? 이렇게 끊임없이 상상속의 질문을
해서 남자 아이들이 한마디라도 대화를 더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다고 해요.

또한 한국에선 드물지만, 남자아이들도 많이 안아주고 뽀뽀도 많이 해줘야
한데요. 최소한 커서 부끄러워 하기 전에라도 말이죠. 스킨쉽을 자주 해 줘야만
안정감을 얻을 수가 있다고 그래요. 최소한 가정에서라도 말이죠.

또한 남자 아이들은 주변의 남자어른의 행동을 모방하면서 자신감을 얻어가는
데(주변에 모방할 성인 남자가 없으면 불안해 진데요.) 모두 여자뿐이라면 굉장히
불안정한 정서를 가지게 된데요. 최소한 10-11세 정도가 되기 전에는 남자 아이
들이 스스로 공부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하고, 문제가 있어도 그대로 두는게
좋다고 해요.

연구결과에 따르면 주변에 성인남자가 적은 남자 아이들은 보이스카웃 등 남자
만의 캠프를 보내거나, 남자아이들만 있는 학교에 보내는 것이 단기적인 대안이
될 수가 있다고 해요. 또한 가족회의를 많이 열어서 남자 아이가 말하기 싫어하고
짜증을 내더라도 대화를 시키는 것이 좋고, 가능하면 며칠에 한번이라도 부모와
포옹을 할 수 있도록 시키는 것이 좋다고 해요.

남들 앞에서 자식 사랑을 절제하는 것이 겸손의 표시이거나 혹은 자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라는 의미에서 좋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가정안에서 조차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회사에서의 과로에
시달려 좀처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없는 한국의 가장들을 생각한다면,
매우 실천하기 힘든 것이지만 하나 둘 밖에 없는 자식을 위해서 이 정도 노력해
주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연인들 사이에서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하루에 세번만 말한다는 경상도
남자 특유의 보수성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줄 수 있는 정도의
혁신은 필요한게 아닌가 싶어요.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들에겐 하지말라고 하는 부정적인 말보단, 그 아이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저 아이가 얼마나 아프겠니. 혹은 네가
부숴놓은 저 로봇, 의자가 얼마나 아프겠니.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단다.
너도 딱딱한 것에 부딛히면 아프잖니. 제도 많이 아플거야. 이 가볍고 부드러운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은 어떻겠니? 아니면 크래용? 자전거? … ” 아이들이 나쁜
행동이 아니라 다른 것에 흥미를 가질 때 까지 계속해서 대안을 제시해 주는
방법이 좋다고 해요.

그러나, 아직까지 남자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게 하기 위한 학습방법에 관한
연구는 완성되지 못했다고 해요. 일제식 군대식 주입교육을 하거나 의자에
앉고 연필잡는 법까지 강제로 교정해 주는 방식으로 아이들의 성적을 단기간에
올릴 수는 있겠지만 결국 남자아이들의 학습에 대한 흥미를 급격히 떨어뜨려서
스스로 공부할 수 없는 아이를 만들 수 밖에 없데요.

물론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 다 시켜준다고 하루종일 비데오 게임만 하게
하면 안되겠지요. 숙제 다하고 나면 30분만 하자!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면
놀이공원에 데려가 줄께. 라는 식으로 적절한 보상을 하되, 착한 일 할 때 마다
매번 보상을 주는 것 보단, 일정 기간동안 몇번 보상한다는 방식으로 칭찬을
해주는 것이 비데오 게임을 하지 못하도록 야단을 치는 것 보단 좋다고 해요.

야단만 치거나 매만 되면, 부모나 선생님이 보는 앞에선 열심히 하는 것처럼
하지만, 문을 잠그고 방에 들어가거나, 선생님이 보지 않는 곳에선 더 심한
잘못을 하게 된다고 해요.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니까,
눈치만 늘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 세상에 수십억 인구가 모두 적성이 다 다르고, 학습방법도 다 다를거
에요. 이제 겨우 남자/여자의 차이점을 발견했으니까, 국적이나 인종에 따른
학습방법의 차이 등을 밝혀내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요.

수많은 학문, 그리고 과학이 발달하고 있는 만큼, 실험결과로 입증된 최신의
교육방법을 신속하게 도입해서 선생님들의 경험적인 증거에 따른 기존 교육
방법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진리는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안되겠지요. 변화하는 진리를 따라잡으려는 노력이 없다면
안정이나 보수가 아니라 퇴보가 되는 것이지요.

창의력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시행착오를 통해서만 개발될 수 있는 것이지요.
기존의 것을 지키고, 안정만을 강조하다 보면 실수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까지도 잃어버려서 창의력은 사장되어 버리지요.

물론 열린교육을 한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그냥 놀려버린다고 한다면 공부나
학교에 대한 흥미는 높일 수 있겠지만 일정한 정도의 공부가 없다면 아무것도
기억속에 남아있지 않게 되어버리니까 교육적인 효과가 없는 과장된 광대짓
등은 개선될 필요가 있겠지요.

그래서 미국의 학교들은 글을 읽고(읽기와 예습), 수업중에 노트를 하고(듣기와
쓰기), 질문이나 발표를 하거나 시험문제를 만들어 발표를 해서(말하기, 쓰기와
시험준비)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기본적인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
을 자연스럽게 몸에 베이도록 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한다고 해요. 때문에 지식
공부는 중학교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로 되어 있구요. 물론 초등학교에서 이루
어지는 지식 교육은 암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다양한 적성과 흥미를
자극시켜 각자에게 맞는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용도이겠구요.

다만, 결정적으로 미국 교육제도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학교가 잘못 되어
있어서라기 보다는 대학 학비가 과도하게 비싸기 때문에 소수인종 등이 쉽게
학업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죠. 고교졸업율이 40-45%수준에 불과한 주들이
다수를 차지하죠. 학비를 벌면서 다녀야 하기 때문에 대학교를 4년내에 졸업
하는 비율도 50%미만이구요.

요즘은 교육문제의 개혁에
관심이 참 많아요.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학교에서의 공부와
실제 현상에서의 실무는 전혀 다르다라고 하는 오직 일본과 한국에서만 통하는
특이한 주장 때문에 정말로 아이들만 고생한다 싶어요.

사람들이 과학적 실험 결과를 믿지 않는데 어떻게 제대로 학자 혹은 과학자가
길러질 수 있겠어요?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나와도 한국에선
잘해야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위해 공부할 수 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럼, 안녕히 계셔요!
최재원 올림


가끔 맞춤법이 혼동될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무엇보다 낫다를 ‘낳다’라고 할 때입니다. 글을 쓸 때 학술적인 것이 아닌 경우 그냥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자판을 사용해 화면에 옮기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독서가 부족해서,
어휘력이 짧아서 그렇습니다.

“같습니다” 같은 표현도 단정적인 표현을 쓰면 당돌할 것 같아 쓸 때가 많은데 번역체라는
얘길 어디서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이나 한국에서도 놈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 이론에 따라서 한국어도 사람들이
많이 쓰는 것을 문법으로 받아들여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예의 하나가,
저희 고교 선생님도 가끔 쓰시던 “했었었었다”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쓰니가 그런 것이
한글 문법에 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가 쟁점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긴 미국에 와서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들이 비교언어학을 하면서 한글에도 관계사, 혹은 접속사
가 있다고 주장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책을 읽는 그녀를 보았다라는
문장에서 “읽는”의 ‘는’을 영어의 ‘who’에 해당하는 관계사라고 설명하고 있더군요. 그냥 어미일
뿐인데, 영어의 문법이 모든 언어의 보편적인 것이양 생각하다 보니 그런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입니다.

심리학이나 교육학에 있어서도 미국에서 실험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한국에서의
실험결과를 미국의 수치와 맞추기 위해서 설문내용을 조작하는 등으로 문화권의 차이점을 발견
하지 못하도록 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미국에서만 실험한 것이라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무비판적으로 미국의 연구결과만 신봉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무엇이 한국의 전통이고 무엇이 외래문화인지 혼동될 때가 많습니다. 과거에는 중국의 영향
을 받다가, 전쟁을 겪으면서 몽골의 영향, 일본의 영향을 받았고, 386세대는 독일과 프랑스의 영향
을 받았고, 세계화 세대인 70년대 후반 출생자들과 80년대 출생자들은 미국의 영향을 받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 전통이라고 주장되는 것이 실은 일본 것이었다거나 중국 것이었다거나
한데, 미국의 것은 외래문화라 안된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구요.

단적으로, 일본의 기무치와 한국의 김치를 비교할 때, 흔히 고춧가루의 사용을 차이점으로 말합
니다. 그런데 원래 한국의 김치는 16세기까진 소금에 절인 형태였고, 임란이후에 포르투갈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온 고추가 비싼 소금 대신 서민들에게 사용되기 시작한 17-8세기에나 현재의
형태와 비슷한 김치가 되었다고 합니다.

네이티브 어메리칸, 미국의 원주민인 인디언의 역사를 배우다가 본 다큐멘터리에서 중서부 지방
의 한 종족의 경우 우리나라의 설화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 참 흥미로웠습니다.

내용인 즉슨, 우리나라의 햇님 달님, 썩은 동앗줄, 호랑이로 연결되는 설화와 비슷한 것이 있었
습니다. 즉, 평지에 우뚝 쏟은 뾰족탑 같은 산이 있는데, 인디언은 7자매가 곰에게 쫒겨서,
피해가기 위해서 둔덕에 올라 기원을 했더니 둔덕이 산으로 우뚝 쏟아갔는데 곰이 발톱으로
자국을 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원을 해서 7개의 별이 되었답니다.

우리나라의 햇님과 달님 설화와 비슷한데 곰이 악역을 맡고 있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아마도 논리비약을 하면, 우리 단군신화에서 배척된 호랑이 토템족이 구석기 이전에 미국
대륙으로 건너가서 곰 토템 민족을 나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도 만들어 볼만
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북미지역에선 곰이 매우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음흉하다거나
공격적인 의미로 사용이 되거든요. 반면에 한국에선 곰이 단군의 엄마로서 여신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으니까 호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구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개똥철학입니다. 훗.

역사라는 것도 그렇고, 언어도 그렇고 각 문화권의 연관성과 차이점을 찾아서 공부하면
세계 조화를 위한 제3의 길이 많이 발견되리라 생각해 봅니다.

쿠웨이트에서 온 급우한테 들은 얘기인데, 우리가 쓰는 아라비아 숫자를 정작 아랍민족
들은 쓰지 않는 답니다. 아주 오래전에 사용하긴 했지만, 인도의 숫자를 더 많이 사용해서
현대에는 인도의 숫자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인도에선 0을 .으로 표현하는데 이 방식을
따른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렇게 싸우는 히브루어르 쓰는 유대민족과 아랍어를 쓰는 아랍민족의 글자가 참
비슷해서 물어봤더니 같은 샘족의 언어라고 합니다. 인도의 산스크리스트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웃에 살던 사람들이 분명한데 왜 그렇게 싸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세계로 나가려면 정말 세계의 다양한 언어나 문화에 대한 폭넓은 공부나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기사를 보니 포털 사이트 혹은 소설 네트웍 서비스를 하는 업체들의
다국적어 사용에 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월스트릿 저널의 기사인데 가장 큰 마이 스페이스는
23개국어를 사용하고 있더군요. 우리나라도 이제 글로벌 기업을 위해서라도 각국 문화의 다양성
에 대한 개방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전문가를 양성한다는 수주이 아니라, 각국의
젊은이들이 수십만, 수백만 단위로 상대방 국가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두명의 전문가가 개인의 경험적 한계를 가진 정보를 책으로 써 낸다고 해서 문화적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번역을 통해서 한국에 소개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일본에서 성공한 작품만 번역이 되다 보니까 일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화를 수용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구글의 도서관 프로젝트처럼
우리나라도 이제 서양의 원전을 폭넓게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작권
계약을 통해서 포털 사이트들이 유용한 외국책을 원전과 번역물을 동시에 소개해 주는 것도
사회공헌과 마케팅을 함께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은 1970년대 말에 이미 식민지 시절 한국에서 가져간 각종 사료를 60만건 이상 자기식 한글
코드로 데이터베이스를 해 놓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은 이제 겨우 몇가지 사료의 디지털화에
그치고 있을 뿐입니다. 각 가문의 족보나 국문학 자료들 등등 디지털 박물관을 만드는 것도 이런
사회공헌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스캔해서 보존만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국어사전만 해도 출판사에서 나오는 것 이외의 다른 창의적인 형태도 발전시키는 것도 포털의
주요한 아이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 대사전을 보면, 특정 단어가
몇년도에 어떤 문학작품에서 사용이 되었는지, 작가의 이름과 사용된 문장, 그리고 연도별
사용빈도수 등등 각종 참고자료가 많습니다. 지도 서비스에 각 지방의 전설이나 설화가 어린
바위 등을 사진으로 제공하는 것도 교육적이면서 창의적인 서비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라디오 방송으로 소개된 설화를 음성으로 제공할 수도 있겠구요.

앞으로 이런 문화를 활용한 정보서비스가 많이 나와서 한국 문화에 익숙치 않은 교포들이나
한국의 10대 20대들도 문화를 공유할 수 있도록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박사님이 가르쳐 주지 않으시면 제가 어떻게 옳은 표현을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고교과정을
지나버리면 아무도 맞춤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배울 기호도 없으니까요. 얼마전에 대선후보
들이 맞춤법이나 외래어 표기법이 틀렸다고 하는 얘기가 나왔는데, 그건 그 나이 또래의 사람
들이 새로운 교육과정에 따른 수정된 맞춤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세대간의 대화가 없다면 어떠한 전통문화도 사라남지 못하지 않나 싶습니다. 386세대까지 인맥
조사를 하면, 중앙일보사의 데이터베이스상 수백명내지 수천명까지 서로 연결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류 고등학교 문화가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속한 세대인 소위 X세대인 35세
이하의 경우엔 아무리 연결을 해도 4-5명이 평균적인 인맥숫자라고 합니다. 그만큼 세대간의 대화통로가 단절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심지어 서로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도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386세대는 ‘낭만적’이란 말을 어설프다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는데, 얼마전 노무현 대통령도 그런 의미로 ‘낭만적’이란 말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겐 ‘낭만적’이란 의미를 로맨틱하고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주변에서 한번도 어설프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에 정의된 의미가 아닌 것으로 사용되는 단어의 경우 세대가 틀리면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소통하지 않으면 서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습니다. 10대의 경우에는 sick이란 단어를 연예인에게 쓰면 정말 좋다는 의미로 쓴다고 합니다. 다른 세대에겐 보통 지루하다거나 멀미난다거나 하는 의미인데 말입니다. 토할 것 같다는 disgusting의 의미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세대가 있다고 합니다. 결국 세대마다 서로 다른 용어사전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대간의 대화를 하지 않으면, 부모 자식간의 대화가 단절되고, 형제자매가 희소해진 상황에서, 학교의 선생님들 마저 인간적인 대화없이 칠판 판서만 하고 있다면 더더욱 다른 세대를 이해한다거나 문화를 공유 혹은 보존해 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시험을 만들고 필수과목을 정하고 한다고 해서 문화가 보전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대간의 대화의 장을 만들고 다양한 문화를 공유하는 공간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털사이트들이 댓글 문화를 좀더 건설적으로 끌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비난의 장이 아니라 따뜻한 정이 오고가고, 건전한 토론이 진행되는 공간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잘못된 표현을 바로잡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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