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영어 용어, 발음, 문법교육에서 벗어나야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학기엔 문법이랑 발음이랑 기초를 많이 다지고 있어요. 듣기도 굉장히
많이 향상이 된 것 같아요. 독서 속도가 빨라지니까 듣기도 점점 좋아지는 것 같
아요. 마치 에스페란토어를 익히는 양 의미구 단위로 머리속에 집어넣으면
저 혼자서 알아서 이해가 되니까 번역에 별도로 시간을 쓰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한국어나 일본어.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쓰는 스와힐리어는 모음이 없으면 발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성대를 사용하지 않고 바람소리만을 이용하는 영어의 무성음이
없다고 그래요. 더구나 무성음이란 뜻의 “Unvoiced” 혹은 “Voiceless”란 소리를 낼듯
말듯 내는 것이 아닌데, 한국 사람들 귀엔 잘 들리지 않는 소리니까, 영단어의 끝에
있는 자음은 소리가 들릴 듯 말듯 내라 그렇게 가르친 것 같아요.

그래서 한국, 일본, 대만, 그리고 중국 사람들은 단어의 끝 소리를 내지 않아서
미국이나 인도유럽어족 언어를 사용하는 터키 등 유럽인들에게 들리지 않는
소리를 내는 것이구요. 예를 들어” wet”는 웻이 아니라 웨하고 t라는 무성음을
발음해야 하는 것이죠. “sink”도 싱크가 아니라 싱하고 k 바람소리를 내야하는
것이구요. 문제는 이들 무성음이 한글에 없기 때문에 모음을 붙여서 성대를
사용해서 소리를 내다 보니까 미국이나 유럽인들 귀에는 다르게 들리는 것이죠.
“wet”라고 해도 웻이라 하면 “wed”랑 구분을 못해요. th등의 소리도 그렇구요.

발음훈련을 할 수 있는 캐나다에서 만든 소프트웨어를 발견했는데 정말 좋은
프로그램인 것 같아요. 자신의 발음을 그래프로 만들어서 주파수로 비교해 볼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무성음들은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선생님들이 가르쳐 줄 수도
없었던 것이지요. 무조건 받아쓰기를 하면 듣기실력이 좋아지지지만, 정작 말하기
는 달라지지 않으니까. 별도로 발음을 배워야 말할 수가 있는 것이구요. 50년 100
년이 지나도 그 선생님이 그 제자를 키워서 영어를 가르치니 한국이나 일본의
영어교육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 것이지요.

굳이 원어민에게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기초적인 발음과 문법
등을 일본식이 아닌 미국이나 혹은 인도유럽어족의 소리로 배우다면 말이죠.

그러다가 발견한 건데 우리가 한글을 우랄 알타이어 어족이라 배웠는데 이것이
아직 서양 학계의 검증을 거친게 아니라고 그래요. 몽골어 계열인 알타이어나,
러시아 혹은 그 변형인 핀란드, 헝가리어 처럼 우랄계에 속하는 것인지 아직도
논쟁중이라고 하는군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게 검증받지 않은 학설인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아요.

증거라는 것이 겨우 합성어의 사용(계란과자 등)과 모음조화 현상(양과 음의
모음끼리 사용한다는 것) 정도인데 나머지 글자나 발음 모두 다 전혀 다르거
든요. 어순이 주어/목적어/동사라는 것은 라틴어도 똑같데요. 결국 어순이
달라서 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라틴어를 쓰는
로마 사람들도 영어를 잘 하잖아요. 인도유럽어족이나 기타 서양언어의
구분 기준과 한국과 일본의 언어는 서로 알아 들을 수 없는 별개의 소리를
많이 쓰기 때문에 영어 학습법도 전혀 달라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언어는 암기나 이해만으로 그치는 공부로써는 배울 수가 없고, 실생활에 쓸
정도로 훈련이 추가되어야만 하는 것 같아요. 한글을 떠올려서 번역하는
방식으로 영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아기가 되어서 모든 문장을 따라
하는 방식으로 다시 머리에 새로운 문장을 집어 넣는 것이지요. 영어로 된
책을 번역이 아닌 영어식(의미구 단위로 머리에 집어 넣되 다시 재구성하지
않는 것)으로 집어넣을 수 있도록 독서를 새롭게 해주면, 점점 영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문화처럼 점점 가랑비에 젖어드는 것이지요. 몰입교육이 필요한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문화를 번역문이 아닌 그 나라 언어로 독서하는 습관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글쓰기 역시 일본/한국식 영어 작문이 아니라 영어독서를
한후 그에 관해서 말하기 혹은 글쓰기를 함으로써 내용있는 글쓰기를 배울
수가 있을 것 같구요.

언어학자들이 아무런 검증없이 서양의 이론들을 적용해서 별도의 언어교육
방법이 필요한 한/중/일/대만의 상황을 더 혼동시킨 것 같아요. 발음을 구사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란 거지요. 또한 일본식
문법용어의 사용이 더욱 이해를 어렵게 한 것도 있는 것 같구요. 성대를 사용
하지 않고, 모음을 사용하지 않고 소리를 내는 “unvoiced”를 무성음이라고 번역
해 사용하니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한국이나 일본어
에는 없는 개념이다 보니 일본사람들도 이해를 못하고 번역하다보니 그렇게
되었겠지만요.

결국 영어를 공부하는 왕도는 특정 표현이나 특정 문장을 외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기본 독서량을 늘려서 미국인들 수준으로 영어책을 많이 읽어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번역을 하는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는 거죠. 100
페이지를 읽어서 실생활에서 바로 쓸 수 있는 문장 한두개를 본능적으로
익히게 되는 것이 유일한 콩글리쉬 아닌 영어문장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해요.

아이들이 24개월때 30개 단어, 36개월에 1000개의 단어를 쓰다가 어느 순간에
의사소통이 가능한 단계로 말을 하듯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문법과
단어를 암기해서 접근하기 보단, 기초부터 다져서 새로운 문화권에 다시 태어난
것 처럼 영어독서량을 늘려줘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시간이 없다며, 특정
표현이나 문장을 외우는 방법으로 접근하면 시간이 지나갈 수록 영어를 잊어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프리젠테이션용 표현과 토론용 표현을 별도로
외워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은 불필요한 암기력 낭비라는 것이지요.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꾸준히 영어 독서량을 늘리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속적으로 영어실력이 늘어나는 것이지요. 작문법을
배워서 한글에서 영어로 글을 옮기긴 보단, 영어 독서를 하다가 좋은 표현을
반복적으로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글 쓸 때도 그러한 표현이 나오게 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언어학습법이 되는 것이지요. 마치 무조건 암기를 하기
보다는 7회독 8회독 하면서 소설 읽듯이 많이 읽어주면 자연스럽게 본능적
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요.

한글로 경험한 것을 영어로 쓰기 보다는 영어로 된 영화를 보고 영화 관람평을
쓴다던지, 영어 소설을 보고 줄거리를 수학공식처럼 정리해 본다던지, 혹은
영어 판례를 읽으면서 각 문단의 첫줄, 주제문을 뽑아내서 목차를 정리해
본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영어 경험을 영어로 써 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어로 된 교과서적인, 아카데믹한 글을 많이 읽으면, 영어 글쓰기뿐만 아니라
한글 글쓰기도 표현이 다양해질 수 있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기존의 선생님
들이 가르치는 방식으로는 100년이 가도 절대로 잘못된 발음이나 잘못된 문법
을 새로 배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영어로 된 발음책이나 문법책을 사서 공부 한다고 해도, 결국
번역하면서 일본식 발음용어나 문법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여전히 잘못된
영어를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해석되는, “although”나 “even though”를
양보의 부사절을 이끄는 접속부사 이렇게 외우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죠. 영어로는 대조관계를 표현한다는 뜻으로 “expressing contrast”이거든요.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때문에(because)가 아니라, 인과관계의 반대인 대조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because)비가 오기 때문에 소풍을 못갔다”는 인과관계를
나타내지만, “(even though)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소풍을 갔다”는 대조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니까요. 얼마나 일본식 문법용어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다른 예를 들면, “so that”을 결과용법이라 배우는 것이지요. 혼동되기 쉬우니까
“so”와 구분을 못한 일본이 엉터리로 문법용어를 만든 것이지요. 아예 “소데쓰”
라고 일본어로 만들어 쓰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어로는 “purpose”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즉, “(purpose)시험에 합격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는 두 문장이 “(so that)열심히 공부했다 so that 시험에 합격하기를 원해서”
라고 되는 것인데 결과용법으로 잘못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단어의 일본식 번역 역시 개념을 잘못 이해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logic”의 경우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로지”라고 발음을 따와서
글자를 만드는 가차문자로 표현을 하는데, 일본은 사고방식이란 의미로
논리라고 번역을 합니다. 영어의 의미는 타당한 근거와 타당한 결과, 즉
모든 단계에서 타당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일본식 번역은 각자의 사고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식의 나의 논리, 너의 논리라고 엉터리로 말해지는 것이 가능
하도록 만든 것이지요.

언어가 문화를 지배하는데, 이렇게 엉터리로 서양 문화가 수입되니까, 제멋
대로의 해석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한국/일본/중국/대만이 합리적, 객관적
이지 못하고 권위주의적, 주관주의적, 이중잣대를 사용을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도대체 합리나 논리가 무슨 개념인지 알지를 못하기 때문이지요.

발음에 대한 잣못된 지식 역시 심한 형편입니다. 예를 들어 영어에는 “오”라는
발음이 없습니다. “오우”라고 하죠. 그리고 국제발음표기법으로는 장음과 단음
으로 표기되는 “beat”의 i발음과 “sit”의 i발음은 길게 짧게 하는 한국식 장단음
구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외국언어를 도입할 때, 한국어나 일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언어식으로 이해하여 가르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입니다.
영어로는 혀의 근육을 사용해서 긴장음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장음으로 아는
“beat”의 “이” 발음입니다. 긴장음이니까 진동음, 즉, 바이브레이션이 발생
합니다. 근육을 쓰다보면 손가락이 떨리듯이 말이죠.

반대로 “sit”의 경우에는 의식하지않고, 혀의 근육을 전혀 쓰지 않은채 “으”에
가까운 “이”죠. 결국 영어에는 한글의 “이”에 해당하는 발음이 없는 것이죠.

결국 우리 귀에는 구분되어 들리는 소리가 인도유럽어족의 사람들에겐
똑같은 소리로 들려서 서로 의사소통이 힘들어 지는 것이지요. 문장이
아니라 특정 단어 하나만 들려줘서 상대방 외국인이 알아듣느냐를 검증해
보면 쉽게 알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wet”와 “wed”를 들려주고 인도유럽어족 사람에게 구분해 보라고
해보면 아마 잘 못할 것입니다. 우리 귀엔 구분되어 들리는데, 한국/중국/
일본/대만 이외의 나라 사람에겐 같은 소리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혹은 b/p/f/v/r/l 등의 발음을 녹음해서 주파수로 분석해보면, 인도유럽어족의
소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귀를 믿으면, 선생님이
발음을 가르쳐 줘도 알 수가 없는 것이죠. 아무리 원어민에게 몰입영어교육을
받아도 안되는 것이죠. 발음전공자에게서 정확한 혀의 위치, 입술의 모양,
그리고 혀의 근육의 사용량 등을 정확히 배워서 사용하면 되는 것이지요. 39개의
영어 특유의 발음을 배우면 되는 것을, 애들 잡아가면서 몰입교육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럼, 안녕히 계셔요!
최재원 올림


제 전공은 법학입니다. 92년부터 지금까지
법학만 공부하고 있어요. 다만, 법이 문화에서 나왔으니, 미국과 우리나라의 법학을
비교하려면, 먼저 문화를 알아야만 하겠단 생각이 들어서, 언어도 문화의 하나로
그 차이점을 공부해 보고 싶었습니다.

두개의 문화를 비교할 때에는 경험이나 선입관에 의해서 외형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 그러한 외형을 가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같이 살펴봐야 하고, 또한 논문 등
객관적인 검증자료로 객관성을 확인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개의
문화는 다수인 주류문화가 있고, 소수인 비주류문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저
혼자 경험한 것이 보펴적인 다수의 문화인지 확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잘못된
일반화를 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책이나 논문에서도 같은 내용을 언급
하고, 개인적으로 저도 그런 경험을 했다면 단지 이론적인 주장이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미국의 연구가 대부분 미국인이나 유럽인을 상대로한 실험을 거친 것이라
우리나라나 중국에도 적용된다고 확실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심리학
등 각종 실험에서 아시아인과 미국인의 차이를 연구하는 실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
지만, 아직 갈길이 멀지요. 한국 등에선 각종 서양연구의 한국화라는 명목으로 실험
결과 수치 맞추기만 급급할 뿐, 문화적 차이에 대한 연구는 없는 형편입니다.

또한 미국은 한국이나 중국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문화적 차이가
있는지 연구를 하지 않아 왔던 것이구요. 미국의 연구논문이 없으니, 서양 논문을
따라가기 바쁜 아시아의 학자들이 문화적 차이를 연구할 방법이 없었던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작년부턴 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문화적 차이나 심리학 등 개인적인 공부를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박사과정에서 법학을 더 공부하기 이전에 배경지식으로 삼으려는
목적도 있구요. 언어교습법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구요. 다행히 미국에는 다양한 책과
논문들이 대량 생산되어 나오기 때문에 굳이 전공자가 아니라도 관심 여하에 따라서 얼마
던지 개인적인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출판시장이 사장되어서 교과서 아니면 자기계발
서 밖에 출판되지 않는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야의 공부가 가능한 것이지요.

참, 제가 언급한 발음훈련 소프트웨어는 “Pronunciation Power”라는 것인데, 초보자용과
중고급자용 등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 가격이 10만원정도로 비싸기 때문에 본문에선
상품명은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어학원에선 단체로 구매해서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능은 바로 각 발음마다 주파수 그래프로
보여주고, 녹음하여 비교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입니다. 발음을 연습해서 모범 주파수
그래프를 그릴 수 있다면, 외국인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비교적 정확한 측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서점에서 구한 Acoustic Phonetics라는 책을 보면, 인간의 목, 그리고 입 등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하여 소리가 어떻게 달리나는지를, 각 알파벳 별로 주파수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 주파수가 다르게 나는지, 수학 공식으로
설명을 해 주고 있으니 참 재밌는 접근법이지요. 얼굴형이 다른 동양과 서양인이 다르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은 굳이 수학공식을 언급하지 않아도, 오디오의 스피커가 다르면
소리가 다르게 나는 것으로 설명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색깔로 주파수로 나타낼 수 있고, 인간의 음성이나 피아노 등 악기의 소리, 그리고 이동
통신 주파수나 방송 주파수, 그리고 심지어 유리잔의 고유 주파수(진동수)에 이르기
까지 모두 같은 주파수단위로 측정이 가능하다는 것이 참 신기하지 않습니다. 요즘 전공
이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함께하는 전공간 연계 연구가 활발한데 영어교육과 물리학이
접목될 수도 있고, 음악과 영어교육이 접목될 수도 있다면 효과적을 학습의 흥미도를
높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배운 것이 바로 모든 학문과 공부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가지 전공만으론, 연구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전공인 법학만 해도,
협상, 중재, 조정 등의 수업을 위해선 심리학 지식과, 문화인류학 지식, 그리고
언어의 사용 등 다양한 배경지식을 요구를 합니다. 경험을 통해서 이들 지식을
숙련하는 것이 바로 국제협상을 주도하는 변호사들의 일이기도 하구요.

또 다른 예로 음악만 해도, 왜 인간은 음악을 들으면 행복해 할까? 혹은 슬퍼할까?
등도 심리학이나 사운드 공학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특정 주파수
의 소리에 공명하면서 파나 솔음과 같은 소리에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음악의
각 음정과 인간의 심리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작곡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음악과 심리의 관련성을 이용해서,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거나, 반대로 아이러니컬 하게 슬픈 장면에서 즐거운 음악을 삽입
하는 등으로 활용을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월남전 영화에서 죽으러 가는 병사
들을 배경으로 “왓 어 원더풀 월드”라는 곡이 나오는 것 처럼 말입니다. 이런 음악의
특성을 활용해서 심리치료의 방법으로 사용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혼자서 모든 전공을 섭렵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시간적 여유도 없습니다.
결국 다양한 전공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각자 전공에서 부디딘 한계를 파괴
시켜나간다면 좀더 혁신적인 아이디어도 많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나
라는 아직 이런 협력이 어렵고, 상상력의 빈곤으로 인접분야가 아니면 전공의 연계 등은
상상도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아무쪼록 인터넷이 이런 전공의 편협성을 깨고,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서로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편의장치
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순백 박사님, 항상 격려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문학의 표현방법이나, 문장의 작성
방법, 그리고 문단의 작성방법 등 대부분이 세계 보편의 것이어서 은유법, 직유법, 의성법,
의인법 등이나 연역법(두괄식), 중괄식, 귀납법(미괄식) 등등 글쓰는 방법이 만국 공통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유럽이나 남미처럼 문장을 길게 길게쓰는 것을 좋아하는 문화가
있고, 미국처럼 짧게 쓰되 연결어를 많이 사용해서 독자들이 글을 읽기 쉽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문화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작문수업은 단어, 문장에서 바로 전체 수필쓰기로 건너띄어서, 아주 기초적인
문단쓰기 교육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생각의 한단위라고만
배우지, 정작 어떤 것이 생각의 한단위인지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지요. 영어 글쓰기에선
주제문장 하나와 주제문을 설명하는 중요하지 않는 문장들 여러개가 한 생각의 단위라고
가르칩니다.

저 역시도 한글로 글을 쓸 때에는 한 문단에 주제문 하나씩만 넣도록 노력하지만, 버릇이
여러개의 주장을 한문단에 넣도록 되어 있어서 곤란을 겪습니다. 영어문장을 쓸 때에는
자동으로 고쳐지지만, 아무래도 한국의 교육이 작문훈련을 시키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
니다.

자신의 주장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근거를 서너개 이상 쓰라는 것이 영어 글쓰기
의 핵심입니다. 그냥 상식이니까 아니면, 어딘가에서 내가 읽었거나 배운 것이지만 이미
내것이 되었으므로, 내 생각으로 아무 근거없이 주장만 늘어놓아서 일정 분량이 되면
문단을 바꾸면 된다는 것이 한국식 글쓰기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신문의 사설이나 컬럼
들입니다. 논설위원들의 주장을 아무런 근거없이 열거하면서,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할
법한 주장만을 내어 놓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문 사서은 근거는 없고,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다거나, 국민 여론이
그렇다는 식의 비합리적인 것을 근거라고 글을 씁니다. 주관적인 글쓰기일뿐만 아니라
사실과는 다른 개인의 감정에 따른 글들이지요. 글에서 언급된 근거에 대한 객관적
증거는 하나도 없고, 의혹을 근거라고 제시하는 무책임하고 비합리적인 글쓰기의 전형
입니다. 신문사설을 논술시험 준비용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글쓰기를 장려
하는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웅변처럼 국민들의 감정을 이용하여 사실을 왜곡하거나,
선동하는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학생들이 객관적으로 학문을 하기 위해 배워야
할 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대학의 경우에는 모든 신입생이 최소한 비판적 사고하기, 비파적으로 글쓰기와
같은 공통필수 과목을 듣습니다. 표절하지 말것과, 레포트를 작성하는 방법, 전공마다
다른 각주달기 방법 등 대학생활에서 필요한 글쓰기를 윤리와 함께 가르칩니다. 또한
말하기 등도 주요한 교양과목입니다. 파티에서의 말하기나 토론수업에서 말하기 등등
말하기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이 대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수업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학 신입생들에게 아무도 대학교 수업의 레포트 작성방법,
시험답안 작성방법 등 기초적인 내용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교양 국어 등도
전공 수업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 고교 국어의 연장일 뿐이구요. 그러면서 교수들은
학생들이 글쓰기를 못하고, 레포트를 쓰지 못한다고 불평합니다. 자기들은 원래부터
글쓰기를 잘 했던 것 처럼 말이죠. 교수나 학교당국이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
주지는 않고 왜 모르냐고 불평해선 안될 것입니다.

더 가관인 것은 고교과정까지 어느 곳에서 논술작성법을 가르쳐 주는 교과과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학은 논술시험을 쳐서 학생을 뽑아야 한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을 시험을 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교수들이야
대학원 과정에서 논문작성법을 배운다고 하지만, 고교생들이 어디서 그런 글쓰기를
배우겠습니까?

대학생들의 표절이 문제가 되고, 인터넷의 레포트 장사 사이트가 성황을 이루는 것을
비판하는 교수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학생들이 무엇이 표절이고, 왜 표절을 하면
안되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글쓰기 수업에서 윤리와 함께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인데
글쓰기 수업 자체가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니 학생들이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교수든 누구든 표절을 하면 공직자가 될 수 없다고 사회는 비판을 합니다.

인간이 배우지 않고 어떻게 윤리나 표절여부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사회의
모순이 바로 이런 현실과 괴리된 교육의 문제입니다. 현실에서 문제가 될 만한
윤리나, 시험에 필요한 글쓰기는 초등학교때부터 꾸준히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초중등 교육과 대학교 교육이 서로 연계되어 있지 못하고, 서로 교류도 하지
않으니까,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도 않고 학생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글을 써봐야 잘 쓰고, 책을 읽어봐야 독서를 잘 하게 될텐데, 학생들을 사교육에
찌들게 하고서는 왜 글을 못쓰느냐, 독서를 하지 않느냐, 문화공연을 보러 가지
않느냐고 사회가 비판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국민들이 모두 입시시험에 찌들어
고교시절까지 문화공연이나 일반적인 독서는 해 본적이 없다면, 어떻게 그들이
문화체육 공연을 돈주고 즐기기를 기대하고, 책 읽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문화예술계나, 체육계, 그리고 출판업계의 사람들은 정부에다가 지원
금을 달라고 손 벌리기 보다는,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학생들이 입시에 시달리지
않도록 해 달라고, 음악과 체육, 그리고 미술을 즐기는 과정을 더욱 확대해 달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화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공짜 티켓을 주더라도, 그들은 지루하고 짜증난다고 어려운 공연은 보러 가지
않을 것입니다. 체육의 비인기종목도 결국은 그 종목을 즐기는 초중등 학생들이
없고, 어른들이 운동을 즐기지 않으니 룰도 모르고, 따라서 올림픽때처럼 메달따기,
우리나라 1등나라 만들기 열풍에 의해 관심을 가질때가 아니면 아무도 운동경기를
보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트 스포츠를 지원한다고 정부에서 예산을 집중하면, 결국 일반인들의 생활운동에
관한 지원은 끊어지는 것이고, 그럼 종목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서 아무도 운동경기를
보려가지 않습니다. 그럼 다시 스포츠계는 정부에 손을 벌려야 합니다 이런 일이, 음악
공연이나 문화공연, 미술전시 등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전부 정부
예산만 더 타오길 기대하지 정작 국민들이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물론 국민들이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고, 독서를 늘려서 출판업계를 살리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우선 부도직전에 몰린 기업들에 별 도움이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정부예산
에만 눈을 돌리고, 소비자들인 국민들이 학창시절의 입시지옥에 사로잡혀 독서의 즐거
움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그대로 둔다면 근본적인 원인은 두고 자꾸 임시 구제책만
쫒는 잘못이 될 것입니다. 교육을 개혁하고, 입시지옥을 없애서 국민들이 문화를 즐기고
가족과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해 준다면 선순환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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