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사회적 왕따, 자살율이 높은 이유, 심리상담으로 치유해야.

오늘 CBS의 “김미화의 여러분”에서 우울증 상담받은 후 정신질환자로 차별을 받는 부조리에 대해서 얘기가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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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은 심리학의 경우 병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행복심리학으로 유명한 마틴 셀리그만 박사가 심리학회 회장을 한 이후 크게 전환이 있었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정신과의사들이 독점하고, 병적인 문제로만 접근하죠. 그러나 미국의 경우 심리상담학 학위과정이 있고, 박사학위를 받고나면 병원급의 심리상담소를 운영할 수 있으며, 의료보험으로 일정시간 무상치료를 받을 수 있지요. 대학교마다 이런 전문 심리상담사가 있기도 하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런 심리상담사 육성이 되긴 하지만, 심리학을 정심병리학과 구분하지 못해서 정신과의사들만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잘못 규정되어 있지요. 그리고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심리상담사가 고용되는 형태로 운영되는 것이 문제구요.

다만 우리나라 학위과정의 문제점은 심리상담사가 되기위해 학생도 심리상담을 통해 자신의 컴플렉스를 해소하여야 하는데 이것이 부실하게 운영이 되어서 심리상담사의 선입관으로 상담받는 사람의 문제를 잘못 진단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미국의 경우에는 정신과의사와 심리상담학 박사와이 차이점은 의사만 약을 처방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약물처방없이 상담만으로 치료를 받을 수도 있는 심리적 불편이 많기 때문에 우리도 의사들의 밥그릇보단 시민들의 건강을 생각해야죠.

자살율이 높은 우리나라의 실정상 전문적인 심리치료사가 학교마다 고용되어 전문가로서 학생들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심리학과 교수들도 10년전 얘기만 수입할 것이 아니라 최신 논문을 국내에 소개해야 해요. 너무 늦어요.

정신과의사의 밥그릇때문에 약물치료없이 심리상담만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환자들이 정신병원을 찾아야 하는게 제일 큰 문제죠. 의료보험의 분류상 일정부호가 정신병원 치료를 의미하고 이것으로 평생 정신질환자로 차별하는것 고쳐야지요.

다만 우리나라는 전문적인 심리상담자 양성과정이 조금 불투명해요. 클리닉 심리상담과 학문으로서 심리학이 구별되어야 하는데 우린 이런 구별이 안되어 있어요. 대부분 논문학위를 가지고 자신이 전문적인 심리치료를 충분히 받지 않거든요.

미국은 학교폭력학생이나 가정폭력에 대해서 형사처벌보다는 전문적인 심리상담사와 상담치료를 할 수 있게 하지요. 의무적으로 몇달간 치료받게 하고, 전문상담사의 의견을 물어 처벌여부을 결정하지요. 치료없이 처벌만 하니 폭력문제 해결안되지요.

폭력의 문제는 사실 심리적으로 강자의 문화가 원인이 아니에요. 무의식중에 자신이 약자이고, 두려움을 느끼는데, 심리는 이것을 자신이 화가 난다고 느끼는게(자신의 내면인식 능력이 떨어지고, 두려움을 느끼는게 부끄럽다는 자기 합리화) 문제지요. 하버드대학의 하워드 가드너 교수의 멀티지능 이론에 의하면 자기 내면을 인지하는 지능도 지능에 포함되지요. 여론이지만, 미국에선 이미 1960-70년대에 아이큐와 사회적 성공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과학적 입증이 이루어졌지요. 그런데 다중지능이론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이걸 마치 아이큐인양 수치 실험을 하니 문제인 것이구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결국 학교폭력의 가해자도 심리적으로는 그들 스스로가 다른 사회적,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이었던 거지요. 화가나서 분노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두려워서 그런 것이란 것을 알려줘야죠. 두려움과 분노를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문제죠.

결국 상담을 통해 그들의 자신감을 키워주고, 폭력이 문제해결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행동인지 심리치료로 알려줘야 하죠. 그런데 우린 이런 치료를 받으면 정신과의사들의 밥그릇때문에 병원에 가야만 하고, 정신질환자로 평생 차별받죠.

물론 현재도 학교나 교도소 등이 상담치료사가 일부 있기도 하지만 클리닉 상담치료사로 양성된 분들이 아니고 논문학위를 받으신 분들이라 여전히 문제가 있구요. 심리학이 심리테스트 등으로 우습게 왜곡되어 있는것도 큰 문제구요. 고쳐야지요.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높고 물리적 폭력만이 아닌 사회적 폭력이 난무하는 것의 원인을 잘 진단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자신감이 없이 자긍심이 낮은 상태에서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불신도도 높죠.

그런데 내면인식의 능력이 떨어져 자기가 왜 불안한지 모르니, 그것을 화가 난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지요. 화가 나서 분노를 느끼고 나는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고, 비겁자가 아니라 자신은 성전을 한다고 자기 정당화를 하지요.

결국 사회적 약자에 사회안전망과 같이, 사회 전체에 만연한 실패내성, 좌절감을 없애주는게 필요하지요. 실패에 대한 오기를 부릴 수 있고, 영원한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게 중요하구요. 예를 들어 미국은 파산이 매우 쉽게 이루어지고 그 불이익도 크지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파산을 하면 전문 자격사의 자격증을 박탈하고, 심지어 파산을 해도 면책조건을 어렵게 해서 늘 “도덕적 해이” 운운하면서 사회적 강자인 금융재벌을 편드는 방향으로 파산제도가 이용이 되구요. 우리나라에서 기업가들의 영원한 패자부활전이 안되는 이유이구요.

미국의 경우 파산을 해도 10년에 한번만 할 수 있으므로 파산직후 신용도가 다시 높아지지요. 10년동안은 추심을 할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플로리다주의 경우 주택 1채는 그 금액이 얼마나 되었든 파산에서 보호를 받지요.

약자에 대한 사회안전망, 강자의 성취동기를 다시 북돋을 수 있는 핸디캡, 경제규제 등을 통해 가끔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지요. 경쟁이 무의미한 사회적 약자와 강자에 대한 맞춤형 도움과 규제가 필요하지요. 사실상 사회적 약자인 빈곤층, 차상위 계층과 상위 계층은 자유경쟁이 무의미하기때문이지요. 그러나 중간계층의 경우 선의의 경쟁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요.

미국이 독과점 기업을 철저히 규제하고, 기업의 베일 제거하기 법과 같이 주식회사 제도를 악용하는 대주주에게 회사법인 대신 민사상 책임을 지우기도 하지요. 그 이유는 사실 강자의 경우 증세와 독과점 규제를 통해 회사 분리 등의 제재로 새롭게 성장의 의욕, 혁신의 의욕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나라 재벌들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자유방임주의 주장으로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그만 두라고 하는 것이구요.

사실 남미 국가에는 우리나라 재벌 빰치는 독과점 기업가가 미국의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보다도 더 부자인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멕시코가 선진국이라거나 멕시코 시민들중 세계 1위 부자가 있다고 멕시코 시민들이 자긍심을 가지지도 않지요. 아무도 멕시코 시민을 우러러 보지 않기 때문이지요. 즉,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든 세계 1위 기업, 세계 1위 제품을 생산하든 아무도 한국민을 우러러 보지 않아요. 우리만 그렇게 자긍심을 가지고 느낄 뿐이지요. 멕시코 모델을 따라가야 한다는게 대기업 위주를 주장하는 장하준 교수나 재벌사교클럽인 전경련의 주장이나 다름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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