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생산성 향상, 근로자가 아니라 경영자의 경영능력의 문제.

총요소생산성이 제일 높은 미국은 주35시간(무급 점심시간 5시간 미포함)을 기준으로 작업량을 계산해서 수주를 합니다. 이렇게 했는데도 기한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만 야근을 하지요. 이렇게 해야만 추가적인 자금이 필요한 직원은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할수가 있지요. 아르바이트란 이렇게 월급으로 할수 없는 자금마련을 위해 일시적으로 하는 것이지요. 이러면 직업의 귀천은 없지요. 아무리 고급 엔지니어라 해도 자금이 부족하면 슈퍼마켓에서 현금수납원으로 일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원래 야근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수주를 합니다. 그리곤 기한단축을 위해서 밤을 새고 주말에도 일을 하도록 합니다. 우리나라의 소프트웨어 개발업계가 3D 직종이 된 이유입니다. 창의성으로 승부하는게 아니라 저가 수주, 직원 혹사, 창의적이기 보다는 단순한 코딩작업의 연장으로 승부하니 문제지요.

왜냐하면 일본의 하야쿠, 하야쿠 문화를 받아서 빨리빨리라고 한 주제에, 마치 이것도 우리나라의 문화인양 근면성실 운운하며 노동자를 혹사시키는 것이 문제이지요. 우린 흔히 도대체 빨리빨리 문화가 어디에서 들어왔나 모른다고들 하지요.

그러나 문화인류학의 연구결과를 보면 세계에서 시간개념이 가장 급한 나라는 일본이고, 하야쿠, 하야쿠란 말이 빨리, 빨리란 말이지요. 그런데 마치 일본 열차시간이 세계에서 제일 정확하다며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건 마치 북한 청년들이 응원을 할때 줄이 잘 마는다고, 그림이 참 정확하다고 부러워하는 것이랑 같은 꼴이지요. 우리가 학습받은 가치가 잘못되어 있으니 그 가치대로하면 훌륭한줄 알지만, 정작 교육받은 가치가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선 의심을 하지 않지요. 이것이 바로 경험론의 한계지요.

모든 이념, 이론을 공격하는 방법은 매우 쉬운데 있습니다. 의외로. 바로 그 학문의 전제가 옳은 것인지 의심해 보는 것입니다. 그 전제하에서만 그 이후의 전문가이니 어쩌니 하는 자들의 논의가 얼마나 모래위에 쌓은 거짓인지 알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경제학은 자원의 희소성을 전제로 하지요. 그런데 유물론이 아니라 유심론으로 가고. 성경의 오병이어나 제3 성경적 해석인 공유의 확산으로 이해한다면 깨어지고 말지요. 즉, 가치의 다양성, 행복을 얻는 원천을 다양화시킨다면 경제학은 설 자리를 잃게 되지요.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라고 해도, 쉽게는 레이건 정부에 의해서 도입된 비용편익 분석에 의한 행정관료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다름아니지요. 그러나 환경보호, 차별금지 등 비용편익분석보다 최우선의 가치보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국회의원들이 입법을 할때 갖다 붙이는 비용편익분석이란 것도 결국 이것이지요. 정책으로 인한 편익보다 비용이 더많이 든다면 해서는 안된다는 것, 이것이 환경보호, 약자배려나 차별금지 등의 가치와 부딛힐 경우 당연히 가치를 우선시 해야 하지요. 그런데 급진 좌파들처럼 각 이해단체들이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모든 분야의 비용편익 분석을 신자유주의라고공격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지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노동생산성이라고 해도, 그 계산방법을 모르면 원인, 결과의 오류 즉, 결론을 원인으로 보고 잘못된 해법을 만드는 문제가 있지요. 노동생산성은 흔히 GDP 쉽게 국내생산 총매출액을 근로자수(1인당 노동생산성)로 나누거나 총 근로시간으로 나누는 것을 말하지요.

1개의 회사나 재벌기업만을 대상으로 놓고 보면, 사실 매출액은 쉽게 변화지 않으니, 근로자수를 줄이면 1인당 매출액을 높알 수가 있지요. 그럼 이게 노동생산성을 높인 것일까요? 회사와 나라는 다르지요. 나라 전체로 보면 근로자수를 줄이는 것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것일까요? 아니지요. 왜냐하면 회사와 달리 나라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이지요. 국민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으니 복지, 교육, 건강 등 투자를 해야만 하지요. 회사처럼 일정 나이가 된다고 자르고 새로 직원을 뽑으면 된다는 방삭은 나라에 적용될 수 없으니까요.

결국 대기업이 하청기업에게 납기단축을 요구하는 문화를 없애야 하고, 창의성으로 기계적인 시간낭비형 개발 혹은 남의 것 베끼기를 통한 근로자의 기계부품화를 지양하는 수 밖에 없지요. 야근을 안해도 돈을 벌 수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것인데 마치 당연히 야근을 해야 먹을 수 있는 기업문화는 없애야 하겠지요. 사실 외국의 매출대비 지출비용의 분배구조를 보면, 임금과 유통비용이 정확히 우리나라와 반대로 구성되지요. 유통물류 체계가 대기업의 친인척 살리기용으로 활용되고, 주먹구구식 인맥사업으로 낙후가 되어있기 때문에 근로자가 계속 희생양이 되는 거지요.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접근을 하니 줄줄 새는 유통비용 문제를 고칠 수가 없지요.

사실 국가입장에서는 근로자의 임금이 상향 평준화되어야 근로소득세도 늘어날 뿐만 아니라 각종 연금기반도 확충이 되지요. 즉, 결국 근로시간을 줄이고, 납기단축형 사업이 아니라 창의성 사업이 존중받는 문화가 되어야 하지요. 결국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를 막는 수밖에 없구요. 이건 공정거래위원회 관료들을 개혁하는 수밖에 없구요.

요지는, 사실 노동생산성이 매출액을 단순히 근로자수 혹은 근로시간으로 나눈 것에 불과하므로, 노동생산성이 낮은 것을 바로 근로자의 잘못이라고 몰아세우는 무식한 왜곡에 더이상 시민들이 속아서는 안되지요. 사실은 분모를 줄이는 방법이 쉬워보이지만 이건 회사경영과 국가운영을 구분하지 못하는 엉터리 경영학자, 경제학자의 왜곡입니다. 실제로는 저가 수출, 가격과 문어발로 경쟁하는 문화를 버리고 창의성, 디자인, 기술개발, 인문과 자연을 아우르는 다양한 문화에 친숙한 경영을 통해 매출액을 높이고, 근로시간을 줄이는 것이 정답이지요. 애플과 삼성의 휴대폰 경쟁을 보면 알수 있지요. 저가경쟁으로 매출액만 높이는 삼성전자보다, 디자인과 기술선도로 고부가가치를 이루는 애플의 노동생산성이 당연히 더 높지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재벌독점, 잘 나가는 데 왜 건드리는냐라고 삼성 재벌문제를 그대로 둘 것이 아니라, 그 미래인 멕시코의 독과점 재벌을 봐야 합니다. 그는 왕족을 제외하면 세게에서 제일 부자입니다. 빌게이츠나 워렌 버핏, 월마트 가족들을 저리 가라지요. 그러나 세상 어느 누구도 그런 1위 부자, 1위 기업이 멕시코에 있다고 멕시코를 선진국이라거나 멕시코인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건희 덕분에, 삼성전자 제품 덕분이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거나 하는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알아야하지요. 보수주의인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우리나라에서만 진보로 통하는 이상한 현상이 이러한 현실왜곡을 가져오지요.

노동생산성은 근로자들의 잘못으로 낮은 것이 아니지요.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이 1, 2개의 사업만 잘하는 것을 착시효과로 해서 수많은 사업실패를 숨기고 있고, 그러한 경영능력 부재로 인한 실패, GDP증대 실패에 노동생산성이 낮은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노동생산성이 이름에 노동이 들어간다고 해서 노동자들 탓이라는 보수언론의 농간에 시민들이 속아 넘어가니 문제지요. 시민들의 각성이 중요합니다. 경영생산성이라고 하면 달라질까요? 기업가들이 매출을 못 올린 것을 왜 근로자 탓을 하는지.

천 명, 만 명을 먹여 살리는 한 명의 인재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재는 만 명, 천 명을 잘 뽑았을 때 그 중 한 명이 나올까 말까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기업들은 이걸 자기들의 낮은 눈으로 천재 300명을 뽑아 천명분의 일을 시키는 것의 변명으로 삼습니다. 주말도 없고, 저녁시간도 야근, 연장근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어떻게 아이디어를 만들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대기업은 대학교 탓만 하지만, 사실 대학생들이 공부하는 건 대기업들이 만들어 놓은 엉터리 인재탐색 시험 기출문제들 아닙니까. 천 명, 만 명을 뽑아 교육을 잘 시켜야 그 중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한 것인데 말이지요. 다양성과 파괴를 통해서만 창의, 혁신이 가능한 것인데, 점진적 개혁 운운하면 나올 수가 없지요. 파괴가 없기 때문이지요.

결국 인재등용 시스템을 전면 개혁해서, 학생들이 그 시험공부만 하더라도 세상일에 바보가 되니 않도록 현실과 괴리되지 않은 시험제도를 구축해야 하지요. 경국 모든 논의를 하다보면, 고용이든, 복지이든, 사업이든 결국 사회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교육개혁 부터 하지 않으면 않되는 형국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런 복잡한 연결은 고려하지 않고, 복지 문제 얘기하는데, 고용문제 얘기하는데 왠 교육? 이러고 있는 것이 우리의 단절된 전문가 문화의 현실이지요. 파벌키우기, 적 만들지 않기 등 좋은 것이 좋은 것이란 일본식 처세술에 사로잡혀 있으니 이러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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