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내가 사랑하는 가족 혹은 이웃 등 사회 구성원을 사랑하느냐, 배려할 수 있느냐의 문제.

이념이나 권리/의무의 투쟁이 아니라 나와 내가 사랑하는 가족 혹은 이웃 등 사회 구성원을 사랑하느냐, 배려할 수 있느냐의 문제.

권리나 의무의 충돌, 투쟁으로 보느냐 아니면 이유를 가진, 사랑하는 가족을 배려하는 에티켓으로 보느냐의 사고방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일본식의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는 것은 적극적 배려가 아닌 소극적 방어의 개념이다.

사무라이가 이방인을 함부러 살해해도 되는 일본 문화에서, 아직도 길거리에서 무례한 젊은이를 두드려 패도 괜찮은 권위주의적 문화속에서 약자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을 좋게볼 수만은 없다.

강자가 약자에게 적극적 배려를 하지 말고  약자가 강자에게 소극적 방어만을 하도록 강요해서는 안된다. 즉 나와 다른 사람, 정확히는 권력투쟁관계에서 나의 권리를 빼앗을 가능성이 있는 비주류, 약자에 대한 사회적 왕따, 이지메를 도덕, 윤리의식의 재무장이라고 왜곡시켜서는 안된다.

누가 더 불편하냐를 기준으로 특권이나 주도권을 다투게 만드는 것을 이해관계 충돌이나 조정으로 봐선 안된다.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 구성원, 이웃을 적극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차원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화장실 양변기의 뚜껑을 내려놓느냐의 문제는 남녀가 서로 덜 불편하기 위한 권리나 주도권 투쟁의 대상이 아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아내, 딸, 여동생, 어머니가 새벽녘에 무심코 양변기에 앉았을때 양변기가 올려져 있다면 쑥 빠질수 있지 않겠는가?

세면대를 먼저 이용한 사람이 세면대를 뒤에 이용할 사람들을 위해 세면대를 닦을 것이냐 아니면 세면대를 나중에 이용하는 사람이 닦으면 되는 것 아니냐의 논쟁도 이런 문제이다. 화장을 고치기 위해 남성보다 거울에 더 가까이 기여하는 여성들은 세면대에 물이 묻어 있으면 남성에 비해 옷이 더 젖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 사회구성원인 여성을 배려해서, 뒷 이용자를 배려하고 세면대에 튄 물을 닦는 것이 필요하다.

누가 더 불편한 일을 담당하게 하느냐의 다툼이 아니다. 사회적 강자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할 탓이지, 강자와 약자가 공정(?)하게 경쟁해서 약자에게 불편함을 넘기기 위함이 아니다.

사랑하는 여성을 위해 배려해야 하는 에티켓의 문제이지 남녀의 성차별이나 권력다툼의 문제는 아니다. 남녀중 누가 양변기를 올리고 내리느냐, 세면대를 먼저 이용한 사람이 닦느냐 나중 이용한 사람이 닦느냐, 즉 누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느냐의 권력/의무의 배분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권리/의무관계의 법의 적용대상으로 보고 법에 의한 지배, 법치가 사회의 지배구조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전형적 오류이다. 상대방을,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하는 배려이고 에티켓이지, 사회적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소극적으로 지켜야 하는 의무나 도덕이 아니다.

법치가 적용되지 않고, 사회적 왕따에 의해서 구현되는 도덕적 의무에 의해서도 규율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바로 배려하느냐 아니냐의 영역이다. 서로 사랑하고 배려해야 하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인권보호 관념이 빠진 권위주의적인 동양의 법치사상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인권보호 개념이 분명한 서양의 법치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강자가 약자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배려하느냐 아니냐의 영역도 있는 것이다.

사회적 지성을 기르고, 내가 타인을 배려해야, 나와 내 가족도 누군가의 배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가야 한다. 남이 보지 않아도, 사회적 왕따,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만큼 자신의 행동이 감춰진 공간에서도 타인을 배려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만 남는 것이다.

물론 법치의 영역에서도 사회적 양심에 의한 따돌림이 아닌 개인적 양심에 의한 법준수도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성대결, 권리/의무의 다툼, 다른 자들 사이에서의 권력투자이라는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된다. 사랑하는 이들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일때가 사실 더 많다.

법으로 처벌받거나 사회적 왕따에 의해 지탄을 받지 않으니 배려안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미래가 없다. 다시 도덕재무장 운동을 하거나 권위주의 시대로 되돌려서 사회적 약자가 생존하기 위해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 즉, 약자가 강자에게 거슬리지 말자고 사회를 끌고가면 더욱 처벌/왕따 없이는, 즉 CCTV 등 감시의 눈길 없이는 비리, 부조리를 숨기는 미래가 없는 사회가 되고 만다.

사회적, 구조적 원인에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공동체 책임주의의 폐단을 버리고 남이 보지 않아도 개인이 남을 배려하는 개인책임주의적 요소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즉 개인의 잘못, 배려하지 않음을 모두 자신이 처한 사회적, 시대적, 구조적 잘못으로 돌리고, 개인이 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일, 배려할 수도 있었던 일을 하지 않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법적 처벌규정이나 사회적 왕따에 지탄을 할 주위의 눈이 없다고 해서 양심적 가책없이 남을 배려하지 않고 나아가 남을 해하는 것은 안된다. 나아가 심지어 사회적 강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부조리와 비리에 대한 법적 처벌규정을 만들지 않고, 힘을 악용해 사회적 지탄을 할 감시와 견제의 눈들로부터 자신의 행위를 감추면서 사회적 약자를 해치는 것은 더더욱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힘으로, 권위로 운영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랑으로, 배려로 운영되는 사회가 미래를 보장한다. 성대결, 세대대결, 문명충돌 등 계급투쟁이나 권력투쟁, 권리/의무의 뺏고 빼앗고의 문제같은 이념논쟁만 신성하고 나와 남의 다른 전에 대한 문제, 세대차이, 경험차이, 문화차이를 이념차이와 같이 중요하게 보는 것을 이념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권위주의의 함정에 사로잡힌 희생양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사로 칼럼에 포함되어 있으며 태그: , , , , , , , , , , (이)가 사용되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