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버리고 극복하라고 하지만, 가치를 버리거나 극복할 수야 없지요.

물고기를 입에다 넣어줘야 국민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믿는 국민에게 아부하는 경험주의자들 관점에서는 물고기만 처다보고, 물고기를 안줬으니 극복해야 한다는 식이지요. 실은 물고기 잡는 법을 알아가자고 하시고 지금 현재의 물고기는 어떻게 잡는 것이냐를 늘 탐구하셨던 모습, 미래의 물고기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탐구하셨던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왜 지금 물고기를 안주냐고 불만이고, 그래서 실패했다고 비판하는 자들의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주권자인 시민들에게 충언을 하는 진정한 신하이고자 했던 대통령에게 왜 주권자인 시민들에게 아부를 하지 않았느냐고 국민을 위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자들이지요. 민심이 천심이네 하면서 시민들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뒤에서 시민들을 무시하고 속이기 위한 이미지 정치를 홍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지요.물고기만 입에다 속속 넣어주고, 대어는 자기랑 몇몇 기업에만 나눠주던 과거의 정권들과 비교해서, 그 시절 물고기는 이미 철 지난 것이고 실패한 것이니 극복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하는 자들이지요.사실은 그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이고, 그 시대의 잠정적 진실을 추구해왔던 과정이고, 미래의 진실을 알아가려는 과정이 바로 그인데, 그 결과물들인 정책을 가지고 그를 판단하니 문제지요.

정책이야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했으니 반성하고 바로 잡을 수 있지만, 그 정책을 찾아가는 과정이 실패였다거나 잘못일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해요. 이건 한 시대의 마지막과 시작을 이어가는 것인데 어떻게 버릴수가 있겠습니까? 말도 안되지요.개인의 카리스마로 정치를 한다면 그 인물을 극복하고 버릴 수가 있겠지만, 이게 소위 차별화라는 것인데 말도 안되지요. 정책은 시대와 세계환경이 다른 것이니 달라질 수 있지만, 그 과정을 찾아가는 가치를 버릴 수는 없는 것이지요.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바로 2009년 그를 괴롭게 했던 도덕적 자긍심 운운하던 한겨레, 경향의 그들이고, 왜 너희들만 추모를 독점하냐며 숟가락 올리던 자들이며, 오로지 비판을 위해서만 노무현의 가치를 얘기하는 조중동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냥 자기 생각하고 드러난 참여정부의 정책이 다르니 무조건 비판하는 자들이지요. 그렇다고 자기 생각이 옳은지 근거를 가지고 있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그들의 상식이 그렇다거나(진중권, 이대근류의 한겨레, 경향) 민심이 그렇다거나(새누리당, 조중동류) 하는 게 다이지요.개인의 경험과 생각은 5천만이 다 다른 것이고 검증을 거치고 과학적, 사회과학적 검증을 거쳐서 원칙과 예외를 구분한 다음에야 비로서 논의해볼만한 비판이 될 수 있을 것인데 이런 과정은 모두 무시하고 생각나는데로 감정에 따라 비판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지요.

거기다가 어줍잖은 자기의 권위가 노무현 대통령의 그것보다 높은데 인정못받는다고 상처받는 자들이지요.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를 버리라 하셨는데 말이지요. 권위가 아니라 잠정적 진실을 추구하셨고, 미래의 가치를 추구하신 분에게 나보다 권위도 없으면서 대통령을 했다고 질투하는 진보의 정적들 말이지요.내가 안되면 너도 절대로 안된다는 비토의식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아무리 인품이 훌륭하고 인기를 얻는 정치인이라고 해도 절대 안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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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옳바른 기회균등을 보장해야…

우리가 기회의 균등을 엉터리로 왜곡해서 가르치기 때문이지요.

취업기회의 균등인데, 이걸 서울대입학의 균등보장으로 끝이라고 하고, 다시 이걸 특목고, 외고 입학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면 끝이라거나 수능응시 기회의 균등이라고 낮추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사회죠.

사람들의 능력을 검증하고 패자부활전을 시켜주는 영원한 경쟁이란 것을 사람들은 무척 싫어하지요. 특히 경쟁이 필요하다고 이를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집입단계에서만 경쟁하고 그 이후부턴 경쟁이 없는 것을 좋아하죠. 즉 진입단계에서 라이벌을 모두 없애고 독과점으로 편하게 살자는게 대마불패론 기업론이고, 관료제, 자격제의 존립근거지요. 소수의 자칭 엘리트들에게 과실을 몰아주고, 대신 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 권위주의에,복종하도록 하는 시스템이죠. 동북아의 권위주의가 유지되는 이유이지요.

기회의 균등은 실제로는 결과적 균등도 포함하는 개념이지요. 미국의 경우 대학에 입학한 학생중 여자가 한명도 없다거나, 흑인이 없다거나 (회사도 마찬가지구요) 하는 등 결과적으로 치우친 대학구성원을 가지고 있다면 소송을 통해 거액을 배상하도록 하지요. 그래서 실질적인 다양성 입학기회가 보장되지요.

우린 사법시스템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학력주의, 회사의 독과점 등이 손해배상 체제로 보상되기 어렵지요. 헌법상 기본권은 거의 형해화가 되어 있구요. 예를 들어, 쇠고기 고시에 대한 헌법재판소 판결은 헌법상 “건강권”은 최소한 보호만 하면 되고 예산 한계내에서 일정 기본권은 최소 보호만 하면 된다고 하지요.

그래서 실질적 기본권 규정이 없던 미국이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이 시작하고 존슨 대통령이 마무리한 차별금지법(Civil Right Act)의 입법을 통해 손해배상의 근거를 만들었던 거죠. 참고로 우리는 헌법상 권리를 근거로 바로 민법상 손해배상을 구할 수 없도록 하지요. 예외가 있지만 강자을 위한 것일뿐이구요. 우리도 이러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지요.

독과점금지법인 공정거래법도 우리나라는 관련 관료제의 실패로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어있죠. 사법시스템과 공정거래위원회의 관료제를 개혁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지요. 법관, 공무원의 신분보장은 강자들을 위해서, 고위직을 위해서만 도움되고, 결국 하위직은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왕따 등 통해 제거해버릴 수 있는 관료제의 실패를 개혁하는게 필요해요. 결국 관료를 뽑고, 경쟁없이 나태해지는 문제와 음주운전 등 부조리가 포착되면 파면시키는 제도가 필요하지요. 재밌는 것은 미국의 경우 행정징계는 이중처벌이 아닌데, 우리 관료들은 이걸 이중처벌이라며 고위직의 파면을 엄청 어렵게 해놓았지요.

이처럼 우린 정의, 공평의 용어정의를 문제삼기 보단 아예 지위고하에 따라 이중잣대가 적용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식의 좋은게 좋다는 식의 문화가 만연되어 있지요. 결국 적을 만들지 말라는 일본식 권위주의적 정치문화부터 없애야지요. 조화, 협력의 협상문화가 존재하지 않고, 경쟁적인 협상가만 존재하는 문제에서 출발하지요. 즉, 윈윈이란 이 세상에 없고, 내가 아니면 남도 못하게 해야 한단 ㄴ 비토문화가 강하죠.

수구꼴통들은 싸우더라도 강자앞에 고개숙이는 관행때문에 차기를 노리고 끝까지 가진 않는데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은 어차피 내가 가지지 못할거면 너도 안되라는 비토문화가 지나치게 강하지요. 어차피 잃을 것이 없으니까요. 동지라기보단 정적들이 모여서 통합을 한다는게 문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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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가장 빠른 개혁

혁신을 위해서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듯 하는 것이 독점금지법의 원리지요. 약육강식이라고 믿는 부자를 위해서도 세금이나 독과점규제, 대기업지배구조 개혁을 통해서 뭔가 혁신을 더할 여력을 만들어주자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냥 자유방임, 힘이 있으니 자기 맘대로하게 가만두라는 것이죠. 삼성전자와 전세계 주식총액 1위인 애플과 비교해봐도, 이미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했음에도 여전히 세계시장에서의 약자 운운 하면서 국내에서의 갖은 특혜를 원하지요. 스스로 자제할 능력이 없다는 반증이지요.

사우디 왕가를 제외한 전세계 1위의 부자는 누구인줄 아세요. 빌게이츠도 워렌 버핏도 아닌 얼마전 이건희회장이 만난 멕시코 독과점 재벌 카를로스 슬림입니다. 그런데 멕시코는 OECD국가중 모든 지표에서 나쁜 건 다 1등, 좋은 것 다 꼴찌지요. 우리가 항상 그 다음.

예전에 일본을 따라간다던 한국, 사실은 세계꼴찌 멕시코를 따라가고 있던 것이지요. 이건희가 멕시코 카를로스 그림을 이기고 전세계 1위 부자가 된다고 해도, 세계인은 한국을 절대 높게 보지 않습니다. 현 세계 1위 부자가 있는 멕시코의 국격을 우리가 높게 보지 않듯이 말이죠.

요즘은 북구모델보다 남미 브라질 룰라 전 대통령이 유행하고 있지요. 미국의 아웃소싱과 시간개념이 없어 천성적으로 자유로운 히스패닉계(멕시칸 등, 스페인어권) 대신 성실하고 부지런한 브라질 시민들이 미국에 대거 진출해서 소득세가 저렴한 브라질에 세금납부하는 등 여건이 우리와는 다르지요. 북구 유럽국가들이 대부분 산유국이라는 점 등도 고려해야 하구요.

외형만 보고 어느 모델로 가자는 주장이나 이건희의 삼성처럼 우리나라 대표선수가 외국에서 잘하면 우리 민족 자긍심이 높아진다는 식의 엉터리 지표쫓기는 이제 지양해야 합니다.

한방, 모든 위기, 부조리를 해결할 선구자, 지도자를 찾는 마음은 이제 버려야지요. 세종대왕도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궂은 일을 해 준(갖은 외척과 라이벌을 없애준 덕분에) 다음에 나온 것이지, 그 혼자 홀로 카리스마나 묘책으로 훌륭한 인물이 된 것은 아니지요.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건, 이제 누구만이 우리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선구자다라는 식으로 남에게서 해답을 찾지 말라는 것이지요. 수단 방법 안가리고 권력만 찾으면, 내가 훌륭하니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마초식 정치를 하지 말라는 것이지, 주권자인 시민에게 충언하는 정치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셨겟지요.

캐나다의 한 총리가 부가가치세를 증세하고 갖은 비난을 받고, 정권을 잃었지만, 그로 인해 캐나다의 무상의료 등 정책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지요. 국민들의 존경과 인기를 계속해서 받기위해 몸 사리고 개혁하지 못하는 일만 해서는 안되겠지요.

결국 위로부터의 개혁은 실패할 수 밖에 없고, 시민이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선거와 정책입안에 참여하는 등 아래로부터의 부패척결, 참여운동이 필요한 것이지요. 정치인의 부패, 부조리는 국민의 부패, 부조리의 반사거울에 불과하지요. 나 정도는 괜찮다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그 극단에 서서 성공한게 기성의 부패, 부조리한 정치문화이고 정치인들이었지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시민이 한사람, 한사람 바뀌는 수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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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자살률 감소, 소외감 해결이 단초

김성환 노원구청장님, 축하드립니다. 소외감, 고독은 나랏님도,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데 큰 일을 시작하셨네요. 다만 세가지만 건의를 드립니다.

첫째, 고령자 스스로가 서로서로 돕는 것이 좋다는 점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을 가르치는 기존의 교육강좌 시스템은 실패이고, 고령자 자원봉사자가 고령자를 가르치고 다시 고령자가 손주들을 가르쳐 농경시대에나 가능했던 존경심을 손주들이 가지게 하는 것이 제일 좋죠. 컴퓨터, 통신분야에서는 일본의 메로우 소사이어티 포럼이나 미국의 시니어네트가 좋은 예죠.

둘째, 고독감, 소외감의 가장 좋은 해소방안을 친가족의 만남, 손주와의 만남이죠. 요양기관에서 아무리 좋은 처우를 받아봐야 손주가 밥먹는 것 보며 굶는 것 보다 못한 법이니까요. 그래서 치매환자 요양급여를 지원하는 것 보다 직접 가족이 돌보는 것에 가족에게 급여비를 지원하는게 훨씬 효과적이죠.

덧붙여 외국의 경우 양로원 옆에 유치원을 두죠. 꼭 친손주, 친조부모가 아니라도 서로에게 정서적 안정을 주니까요. 일본에서는 심지어 소년소녀 가장이나 가출 청소년이 고령자를 돕는 봉사를 하도록 하고 복지 급여를 하기도 하지요. 일석이조이니까요. 적은 예산으로 고령자에겐 소외감까지 해결해주고 청소년에겐 어른의 존재로 인한 정서적 안정감까지 주니까요.

결국 사회적 약자들이 서로 서로 도울때, 자신의 존재 자체로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느낄때 가장 큰 정서적 행복을 얻지요. 소외감, 고독도 해결이 되구요.

어른신들에게 아무 할일 없는 학교 보안관(실은 횡단보도 깃발들게 해요)이나 벽보 등 지우는 일 시키고 급여주는 것보다 유치원, 아이들과 놀아주고나 소년소녀 가장, 가출 청소년들에게 정서적 보호를 주고 돈을 받는 것이 훨씬 자존감을 높여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행정인턴제 중 청소년들의 봉사활동도 복사나 하고 거리를 쓸거나 쓰레기를 줍는 것보다 아동 청소년 복지정책의 구상시 정책모니터링 요원이나 발표자 등 훨씬 의미있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참여하도록 하는 것 이상 자존감을 높일 것은 없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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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권위주의의 첨병 명예훼손, 모욕, 허위사실 유포에 의해 왜곡된 현실.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생각을 통제하거나 그러한 허용될 수 없는 목적을 위해 법률을 정당화할때 가장 위험에 처해진다. 생각할 권리는 자유의 시작이고, 표현은 생각의 시작이기 때문에 표현은 반드시 정부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The government cannot constitutionally premise legislation on the desirability of controlling a person’s private thoughts. First Amendment freedoms are most in danger when the government seeks to control thought or to justify its laws for that impermissible end. The right to think is the beginning of freedom, and speech must be protected from the government because speech is the beginning of thought.” (See Ashcroft v. Free Speech Coalition, 535 U.S. 234, 253 (2002); Video Software Dealers Ass’n v. Schwazenegger, 2007 WL 2261546 (N.D.Cal.) at 9.)

우리나라의 헌법학은 참으로 왜곡이 많이 되어 있다. 일본의 권위주의를 지키는 문화, 허위사실, 명예훼손, 모욕을 처벌하는 문화에 의해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이 허울좋은 장식으로 남겨진 것이다. 서구에 있어 허위사실, 명예훼손은 기본적으로 형사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민사상 손해배상의 대상이 될 뿐인데, 그 경우에도 사생활의 보호와 같이 사적인 명예의 보호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고속도로와 같은 공공의 장소에서 개인의 위치가 사생활이 아니듯이, 공인(public figure)이란 훌륭한 사람,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분쟁의 장소, 공개된 장소에 올라간 사람을 말한다. 즉, 공인의 경우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 모욕의 공간에 스스로 선 사람이고 분쟁을 스스로 불러일으킨 사람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사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해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권위주의 문화의 첨병인 형사상 모욕,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를 처벌하는 것은 폐지되어야 한다. 민사상 손해배상으로 충분하고 그 경우에도 스스로 고속도로에 선 자의 사생활이 보호받을 수 없듯이 스스로 비난을 불러일으킨 자의 명예, 감정 역시 보호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학은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별개로 본다. 우리나라 엉터리 헌법학에 있어서 양심의 자유는 그냥 자기 생각만 하라는 것이고, 그것을 표현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외부로 표현했기 때문에 처벌하는 것이므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국가보안법이 그렇고, 늘 이중잣대로 힘없는 자만 처벌을 받는 명예훼손, 모욕, 허위사실 유포되가 그렇다. 우리나라 헌법의 표현의 자유 규정에 명예훼손 예외가 있기 때문에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라는 그럴듯한 설명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헌법도 마찬가지이나 문제는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 모욕, 허위사실 유포의 경우 서구사회에선 명예훼손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는 점에 있다. 미국 대법원의 판례와 같이 표현은 생각의 시작이므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면 양심의 자유도 억압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있어 표현의 자유, 다양성의 인정은 국가가 호혜적으로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각과 경험은 누구나 제한될 수 밖에 없고, 과학이나 어느 학문 역시 모두 그 전에, 시작에서 부터 연구방법 그 자체에서 나오는 범위와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떤 민족이나 문명권이든 그 한계에 부딛혔을때 유일한 해결책은 그 내부의 대안이거나 제3의 대안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에는 미움을 받는 생각, 하찮은 생각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의 다양성,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린 스스로 우리 문명, 민족의 한계를 극복할 유일한 대안을 말살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현재의 생각으로 미래의 구세주를 말살하는 셈이다.

서구의 법률, 헌법 체계가 인권보호를 기본으로 발달해온 것이라는 점을 무시한채 우리나라는 독일법, 각종 서양의 법률을 권위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일본을 통해 그들의 시각으로 왜곡된 학문과 해석론을 계수해 왔다. 심지어 독도문제를 다루는 국제법 역시 일본에서 왜곡된 외교론, 국제법 학설로 다투고자 하는 모순의 극치를 달린다. 과거에 일본어에 익숙하고 외국어에 서툴렀던 세대와 달리 오늘의 세대는 다양한 외국생활과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들이 많다. 아직도 일본식 해설에 의존해서 서양을 보는 권위주의 세대식 해석방법을 따를 이유가 전혀 없다. 외국어를 그대로 이해하면 최소한 권위주의의 왜곡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에 제대로 된 우리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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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반성, 배움의 길일 뿐, 패자부활전 없는 경쟁은 사실 반경쟁주의자들의 두려움일뿐.

실패, 틀린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 누가 한 문제 틀렸다고 때리는 것도 아니고, 게시판에 라이벌보다 못했다고 공개되는 것도 아닌데 실망할 필요없다. 오기가 정답이다. 과거에 99번 틀렸다 해도 당신의 다음 답이 우릴 구해줄 정답일 수 있으므로.

권위주의, 잘못된 엘리트주의는 인간 심리의 어두운 부분, 계속해서 실패를 경험하게 하면 학습이 되고, 세뇌되어 좌절하고 절대로 반대하지 못하게 된다. 쫄게된다는 말이다. 우리끼리 격려하고 오기내어 틀리면 새로운 걸 배우면 될뿐이다. 그럼 이긴다.

Not being defeated with friends or mommy’s love is the only way to win or at least to overcome the learned failure tolerance.

그러나 동양에선, 특히 권위주의의 일본에선, 이건희가 말하는 싸움닭이론이 주류 권위주의 세력 내부의 학습론이다. 싸움닭을 키우기 위해서는 노련한 노계 싸움닭과 싸움을 경험하게 하여 기술은 익히게 하면서, 실패, 학습된 실패내성을 격지 않게 하기 위해 젋은 싸움닭이 질만 하면 노계를 떼어놓는 것이다.

In Northern, East Asia, especially in Japan, fighting chicken theory says that, if you want to raise your successor, you never let him experience failure. Whenever yours is going to be defeated by experienced one, you must make yours win by using old one’s handicap. In Samsung Chaebol, that was the theory to raise successor. However, its big hole is that, if successor without father experience just one time, he cannot overcome it.

그러나 한번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이 싸움닭은 영원이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동북아의 인재양성론, 자식들이 실패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한 부모들의 과잉보호론의 한계이다. 보수의 한계이기도 하다. 실패의 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자식들은 실패하고 싶어하고 부모는 자식의 고생이 싫어 시행착오를 격지 않게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실패를 극복하는 능력은 오로지 실패경험을 하는 것뿐이다.

틀린 얘기를 하는 것 이외에 실패경험을 쌓을 방법은 없다.

다만, 문제는 경쟁을 싫어하는 동양문화에선 패자부활전을 없애는, 즉 진입장벽을 높여서 점점 더 자기의 경쟁기회를 없애려고 한다. 가장 큰 관문은 수학능력시험이다. 이것이 최근 영국 언론이 지적한 원샷 문화의 단점이다. 경쟁을 얘기하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패자부활을 통해 나올 잠재적 강자와의 경쟁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2인자를 싫어하는 문화다.

과거 반성은 그 사람이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반성할 일이 없는 사람들만 일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평천하, 치국, 제가, 수신의 순서대로 일이 쉽기 때문이다. 수신, 제가가 제일 어려운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수신, 제가에만 신경쓰면, 힘으로, 권위주의로 자신의 부정부패를 숨길 수 있는 교활한 사람만이 치국, 평천하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동양의 고전, 대학에는 분명히 평천하가 우선순위인데, 일본에 의해 왜곡해석된 동양고전은 이걸 거꾸로 수신, 제가가 앞선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Actually, without Japanese extortion on the analysis on confucianism, in Great Learning in old chinese book, harmonizing the world in peace is the first and the easiest one. What is more, governing the nation is next. However, in Japanese extortion with authoritarianism, loving family or train oneself is the first thing to do since governors do not want to be criticized by whom are interested in governing the nation and harmonizing the world. In fact, the most difficult one is to train oneself that cannot be done until and would be dead. Thus, if governor says people should train themselves first, he really want people to have no time to criticize their governor training them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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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사회에서 시민신뢰의 사회로, 권위에서 평등, 약육강식에서 약자배려로.

이번 학기 마지막 시험을 치루고 간만에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이란 영화를 IPTV에서 봤어요. No.라는 말. 시민들이 아니에요.라는 말을 하는 순간이 인간의 다음 진화의 시작이 아닐까 싶어요.

흔히 진화라고 하면, 인간이 그 정점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인간은 진화의 마지막 모습일까요? 성인군자들은 후대가 자신을 닮길 바라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도 아직 진화중에 있거나 잠시 진화를 멈추고 있는게 아닐까요? 다음 진화의 단계는 어떠해야 할까요?

저는 과담, 포퓰리즘 운운하거나 엘리트즘 자체가 잘못된 권우주의란 생각이 듭니다. 혹성탈출에서 유인원들이 똑똑해지는 것을 싫어하는 인간의 모습과 같은 것이겠지요. 통제력이 없는 시민이 힘을 가지면 어떻게 되나. 통제력이 없는 제3세계가 미국을 뛰어넘는 강대국이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들 말이지요.

한번 잘못되면 걷잡을 수 없다는 생각, 시행착오보다는 안전한 길, 점진적인 길이 좋다는 생각.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요? 틀리면 실험을 거쳐 고치고, 다시 고치고 하면서 발전해 가야 하는 게 아닐까요?

구극의 진실을 모른다고 해서 허무주의로 빠지기 보다, 또는 이를 악용해서 거짓말로 세력싸움만을 할 것이 아니라 잠정적 진실부터 하나씩 만들어가고 다시 이를 바꿔나가는 철저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시민들이 설사 잘못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No!” 그건 아니에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우선 필요한게 아닐까 해요. 시민들 스스로 잘못을 얼마든지 고쳐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가끔 집안의 부부싸움처롬, 사회의 이념, 세력싸움도 결국 큰 그림아래에서 보면, 서로 허수아비를 내세워, 허상의 절대진실을 내세우고, 거기서 밀리면 모두 밀린다는 생각에 서로 틀린 얘기를 엉뚱한 대상을 두고 싸우고 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목적은 사라지고, 마음속 두려움이나 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라지고 그냥 전선이 형성된 시점에, 사안에 사로잡혀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에 사로잡히는 것이지요. 정작 이해관계를 드러내 놓고 그걸 조정하는게 옳은데 옳은 명북싸움, 후면의 도덕성 싸움에 사로잡혀 사람에 갖히고, 다시 얘기는 제자리를 돌게 되는 것이지요.

왜 권위를 가지고 힘으로, 약육강식의 자기들만의 규칙에 따라서 시행착오조차도 못하게 하는 걸까요? 실패를 왜 싫어할까요? 왜 패자부활의 기회를 사회에선 주지 않는 걸까요?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는 가정은 경제학 연구방법의 전제이지만, 그건 경제학 연구자들이 스스로 그어놓은 한계일 뿐이죠. 이걸 깨면, 즉, 사람들이 재화를 나누고, 그 전제 밖에 나가서 제3의 대체재를 끊임없이 찾아내면 경제학적 접근방법은 모두 틀린게 되지요.

서양학문은 연구의 방법과 한계란게 분명하죠. 그 외에는 모른다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모든 학문의 구극에 도달하면 이런 학문의 존재이유인 연구방법상 전재나 한계 자체를 깨어버리면 돌파가 가능하지요. 오일 경제는 제3대체에너지 개발과 동시에 무너지듯 말이죠.

결과적으로 엘리트즘이나 잘못된 권위주의의 방식, 즉 카리스마 갖춘 선지자, 영웅을 찾아서 그가 사회통제를 유지하면서 절대로 실패하지 않고 시행착오없이 옳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지요. 잘못이 있어도 반성하고 고치며 되는 것이지 학자의 길, 발언권을 영원히 잃는 것은 아니란 거죠. 넌 이제 끝이야..가 아니라 영원란 패자부활전이 있는 것이지요.

주류나 비주류에서 주류라고 자처하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싫어하지요. 농경사회에선 늘 반복되는 농경작업 탓에 연장자가, 경험많은 자가 항상 옳았지요. 그러나 유목사회에서도 그랬을까요? 지금은 과거의 경험이 반복되는 걸까요? 아니면 모두 변화하고 있나요?

패러다임의 변화(shift of paradigm)런 과거의 이론체계로 완벽하 설명되는 것도 이론체계가 변해감에 따라 틀린 얘기가 된다는 것을 말하지요. 그러니 한, 두가지의 근거만으로 자기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 해선 안되지요.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각자의 패러다임으로 각자 다 옳다는 것, 너와 나의 이견을 힘으로 조정할 약육강식 혹은 권위주의란 없다는 것, 연장자 우선, 가부장제 따위는 없다는 것이 평등이지요.

그러나 평등이라고 해서 정말 모두가 다른 생각을 하고 다 옳은 걸까요? 풍부한 근거를 가진것과 자기 생각만 그런것의 차이가 있지요. 잠정적 진실과 주관적 안상평가가 다른 것이듯 말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서로 인정받으려고 하고, 자기 말은 무조거 믿더주거나 동의, 공감해주길 바라지요. 마초주의자들일수록 더 심하겠지요. 뭔가 서열이 있어야 편한것 아니냐, 불신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엉뚱한 지도자가 나와서 국가가 망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두려움이 있지요. 책임정치와 선거르 롱한 정권교체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의 자세이지요. 여야 지지자들 모두 같지요.

잘못이 있으며 바꾸면 되고, 이렇게 해보고 안되면 다르게 해보며 되는 것이지요.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된다고 하는 마음으론 도저히 패러다임이 변하는, 기존 이론체계가 변하는 상황에 맞설수가 없지요.

불신의 사회에서 신뢰의 사회로, 우리가 서로 믿어주고, 설사 틀린 주장이 있더라도 하나씩 설득해가며, 알려가며, 끊임없이 주권자인 시민을 하나씩 하나씩 설득해가며 잘못을 고쳐가는게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영웅, 지도자,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을게 아니라 주권자인 시민이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진화하고 당당하게 “No!”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 시작하자구요. 틀렸다면 또 이렇게 고쳐가면 되니까요.

괴담, 포퓰리즘 윤운하며 시행착오를 두려워해 권위주의에 기댈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주권자인 시민들 스스로가 서로 믿고 관료제도, 대의정치제도를 견제해 가야하는게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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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길. 모든 발전하는 것에서 아이디어 포착하기. 주권자 시민이 공부해야.

채널 IT. 정말 아이디어의 보고이군요. 조금전 서바이벌 테크스타 방송중. 나는 가수다의 IT벤처캐피털 버전. 오디션을 창업벤처에 도입한 것. 우리나라 벤처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미래산업이 아니라 엉터리 과거산업지원을 엉터리 벤처기업으로 탈바꿈시켜 돈을 투자한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기업, 창의와 혁신의 기업에 투자해야 하는데, 여기에 기존의 약육강식 생태계가 다가와서 기존의 힘서열대로 왜 우리는 지원안하느냐며 각종 로비를 하고, 결국 새로운 기업은 힘이 없어(기존 패러다임, 기존 서열에서 밀린 기업을 돕자는 건데 다시 기존 서열방식을 도입해버리니 문제가 생기는 것) 다시 모든게 원점으로 돌아가버리는 거지요.

예를 들면, 섬유산업이 패션산업으로 돌변하면서 디자인 산업운운하면서 신기업이라고 주장하는 것. 이러니 산업구조조정이 절대로 안되는 것이지요.

농업분야가 GDP의 3%를 차지하는데 정작 우리나라 인구의 무려 8%가 농업에 종사하니 이얼마나 비효율적이냐는 것이지요. 국민 모두가 현재보다 좋은 위치로 가기만을 바라고, 현재의 직업 보호만을 원해선 안되지요.

새로운 산업분야로 가야하고, 그 재교육에 돈이 투자가 되야하는데 우린 이런 사람에 대한 투자가 아닌 기업들에 직접 돈을 주고 경제승수효과가 높은 부수고 새로 짓는 건설업에 투자를 하니 거품만 잔뜩 끼는거지요.

예산부처와 산업지원부처는 경제승수효과를 말하는데 제일 큰게 뭔줄 아세요? 그냥 과천 정부청사 앞 빈공터를 계속 건물지었다 헐었다 반복하는 거지요. 똑같은 건물 지었다 헐었다 하면 최고죠. 이처럼 기존 관료들이 말하는 경제승수효과라는게 엉터리에요. 정무직들이 속아선 안되지요.

수만명을 살리는 1명의 천재를 찾는다고 외국에 스카우터를 보내고, 실패한 열개의 기업을 살릴 하나의 획기적인 기업을 찾는다고 잔뜩 과거의 기준으로 힘신 순으로 투자할 기업을 선정하는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삽질이지요. 기업은 대학들이 이런 인재를 못길러준다고 하구요. 투자자들은 엉터리 기업만 있다고 기업가정신 운운하구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면, 기업이 수만명의 인재를 길러줘야, 그 중에서 천재 1명이 겨우 나올까 말까한 거지요. 기업내 정치에나 신경쓰는 엉터리 천재 1명이 수백명의 천재를 퇴사시키는 우리나라 대기업이 문제인 거지요. 기업은 자기가 키울 생각은 안하고 대학이나 사회탓만 하지요.

창업도 열개를 자유롭게 만들고, 아홉개가 아무런 손해없이 실패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 줘야 그중에 하나의 기업이 성공할까 말까 한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한 다섯개 투자해보고 성과가 안나오면 거품이다 그러면서 다 죽이고 기존 힘의 서열대로 다시 투자하자고 하면서 관료들이 득세하고 다시 기존의 부정부패구조가 나오는 거지요.

참고로 미국은 파산을 하면 오하려 신용도도 높아지고, 변호사, 회계사, 의사 등 전문자격자도 아무런 손해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파산은 자격증 박탈, 신용도 영구 회복불능 등의 손해가 엄청나지요. 그러니 패자부활이 안되구요.

금융기관과 돈을 빌려줄 능력이 되는 사람들 위주로 산업구조가 만들어진 탓이지요. 검사사위를 활용해 외국에선 전혀 처벌되지 않는 신용없는 사람이 돈 빌리는 것에 대해 형사처벌을 하지요. 이것이 우리나라가 미국, 일본보다 고소, 고발이 더 많은 이유죠.

민사소송으로 돈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감옥에 보내거나 검찰, 경찰에 소환되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지요. 실제론 돈을 빌려준 사람이 신용도를 제대로 조사하지 못하고 신용평가기관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탓인데 도덕적 해이에서 더 나아가 국민을 형사처벌하는 제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죠.

명예훼손, 모욕죄를 처벌하는 것도 마찬가지 문제. 약육강식의 구조하에서 강자의 감정상하기, 빈정상하기를 마치 약자의 감정상하기와 똑같이 취급해서 옳고 그르고를 떠나 무조건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죠. 민사배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을 형사로 처리해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죠.

결국 제한경쟁과 진입장벽 높이기로 몇년만 고생하면 평생 경쟁없이 잘 살 수 있는 고시제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죠. 징계를 통한 퇴출, 직업윤리 고양을 통한 퇴출로 평생 경쟁을 시키느느 것을 싫어하는 것이지요.

관료제나 검찰, 법원의 사법개혁이 안 되는 것도 결국 기계적인 정치중립때문에 아무리 부정을 저지르고 잘못을 해도 부장판사, 부장검사까진, 관료는 국장까잔 승진을 할 수 있고. 패자부활전 통해 경쟁 라이벌이 나타나지도 않으니 절대 부패하고 절대 퇴보하는 것이지요.

청대에 황제가 가장건전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황자들중 어느 누구가 차기 황제가 될지 몰랐다는 것이란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물론 사회최약자는 기본 진입장벽탓에 무조건 경쟁을 요구해선 안되겠지요. 마찬가지로 최강자도 자유경쟁만으로 규모의 경제때문에 더이상 혁신을 할 동기가 없구요. 결국 사회 최약자와 최강자는 복지혜택과 규제를 통해 각자 기본 경쟁에 뛰어들기 위한 동인을 만들어 줘야하는 것이지요.

결국 사회계층에 따라 경쟁이 필요한 계층과 규제, 복지가 필요한 계층이 구별되고 그에 맞는 인지행동심리학적 정책이 필요하단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기성 정치권들은 모조건 자유경쟁을 부르짓는 수구꼴통과 무조건 경쟁파괴만으 부르짓는 급진좌파 근본주의자들이 서로 선정적인 정책경쟁을 하는 구조지요. 제3의 길은 없고 그냥 양쪽에서 하나씩 가지자는 엉터리들뿐. 결국 주권자인 시민들이 더 공부하고 더 똑똑해지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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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를 넘어, 평등으로. 주권자 시민의 각성은 반성부터.

헌법상 보호받는 평등권을 포퓰리즘이라고 무시하고, 권위주의는 잘못이지만 권위는 지켜줘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 엉터리 성리학, 임란이후 교조화된 엉터리, 부패한 조선 양반문화인 가부장제 등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얘기인 윤리는 매우 잘못된 접근이지요.

공자의 사상도 아니구요. 특히 동양의 법가사상을 법치주의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응보주의가 법치주의와 구분되듯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주권이 시민에게 있고, 헌법상 공무원은 상관이 아닌 국민전체에 봉사하도로 규정되어 있는데 마치 국가가 황제고, 대통령이 왕인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국가가 아니면 누가 널 지켜주느냐고 하는데, 국가나 장군들이 아니라 우리의 형누나, 동생 자식들인 사병들이 나라 지켜주는 것입니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말입니다. 세금을 내는 국민이나까 당연히 보호를 받는 것이구요. 국가를 내세우면서 사실은 자기의 권위를 지키겠다는 감정주의일뿐아지요.

옳고 그르고를 떠나 내가 너보다 당연히 대우를 더 받아야 하는데 대우를 안해주니 감정, 빈정이 상했다. 그러니 내가 틀린 주장해도 입 다물고 있어라. 마치 부부싸움하면서 내 감정이 상했으니 내가 무슨 말 해도 참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본능, 감정에 집착하는 것 뿐이지요. 약자인 아동들이 유상급식하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저 아이는 혜택을 보는 아니야라는 비난을 듣는 감정이 상하는 것과 자기들 권위, 학벌, 나이를 대우받지 못했다고 감정이 상하는 것이 똑같이 존중받아야 하고, 자기가 힘이 더 있으니 자기 감정이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전형적인 비합리주의이고, 비이성적 사고방식이지요.

평등한 상황에서 누구의 주장이나 그 근거들이 충분히 있는지. 그 근거들이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생각의 오류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검증하여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니 말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못믿겠다. 니 말은 팥으로 된장을 만든다 해도 믿겠다. 저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다.”라는 속담의 모순처럼 우린 길가다 만난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때문에 주장과 근거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문화적 폐단이 있지요. 이건 일본식 권위주의, 임란이후 왜곡된 엉터리 권위주의의 사대부문화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평등하게 논리적, 이성적 사고를 통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약육강식을 말하며, 각자 자기나름의 직책 권위주의를 말하며, 강자의 감정상함이나 약자의 감정상함은 같은 것이고 약자가 피해를 봐야한다는 사고에 젖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대우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심합니다.

불치하문. 아랫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에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의 권위나 과거의 직책, 사람의 인품이 아니라 현재 그가 옳은 근거를 가지고 그런 주장을 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단지 그의 주장이 나의 주관적 인상적 평가에 옳다고 지지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단지 내 감정에 거스르기 때문에 넌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해도 안될것이구요.

국민의 의견을 듣는것을 포퓰리즘이라 비난하지 말고, 국민도 왜 나를 가르치려 하느냐, 내 말을 들으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무릇 정치인, 리더는 주권자인 국민에게 자신에 대한 지지, 투표를 걸고, 목숨을 걸고 간언을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 정치인이 주권자인 국민에게 충언, 간언을 하고 목숨을 걸어 정권이 바뀌고 다시 과거 정권을 재평가하고 하는 것입니다.

국민이 마치 자기가 현재의 주권자, 임금인데 왜 신하인 대통령, 정치인들이 머리를 조아리지 않느냐, 내 말이 곧 벋이다라는 식으로 공부하지 않고 감정에 싸인 요구만 한다면 이건 옳은 것일까요?

집단지성시대에 국민을 깔보고 가르치려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다시 한번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주권자인 국민 전체의 하나로써 그 역할에 맞는 공부는 하고 있는지, 신하인 대통령, 정치인, 관료들의 충언, 간언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나만을 위한 감세, 부동산값올리가, 환율높이기 등 간신의 교언영색에 기분좋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를 말입니다.

신하로써 대통령이 이런 저런, 충언, 간언을 하고 있는데, 정치세력을 목숨을 잃고, 선거에서 패배를 각오하고 간하는데, 정작 현대의 왕인 주권자들 시민들은 왜 나를 가리치려고 하느냐고 짜증내고, 왜 나에게 귀찮은 일을 시키냐며 잘 살게 해주겠다는 교언영색에 속아 잘못된 주권행사, 투표를 한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그럼, 간신의 교언영색과 목숨, 정권교체를 건 충신의 간언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고요? 당신이 좋아하는 장미빛 살림살이 얘기만 하면서 다신 한번만 더 정권맡겨달라는 사람들은 교언영색. 감정에 잘 안맞고, 내가 공부안한다고 타박하면서 정권을 잃더라도 나중에 이해해주실거라면서 끊임없이 귀에 거슬리는 얘길하는 사람들은 충신 맞습니다.

그런데 같은 정치인 그룹에서 후계라는 자가 앞의 사람은 잘못이 많고 자기는 잘 할것이고 국민여러분깨 감정에 잘 맞는 것을 하나씩 다 주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정에 호소하니 옳은 것일때도 있고 틀릴때도 있는데, 옥석을 가릴려면 자기 선배의 간언, 충언을 안따르고 교언영색하려는 자는 배척하면 될 것입니다. 마치 계승한다고 하면서 이건 과오니까 반성하겠다면서 국민의 귀에 달콤한 얘길 하는 사람은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정권 안 잃으려고 하면서 자기는 충언을 한다면 믿지 말아야하구요. 국민 귀에 거슬릴 수 있고, 그래서 정권을 잃으면 어쩔 수 없지만, 노력해서 나중에 국민여러분들로부터 재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사람은 믿을 수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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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을 테스트하는 엉터리 시험에서 응용력, 창의력을 테스트하는 시험으로.

다치바나 다카시 교수의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라는 책에도 보면 왜 동경대 법대 학장은 반성할 줄 모르나?라는 얘기를 하지요. 수많은 부정부패한 제자를 길러낸 교수가 반성하지 않고 학생 개인탓만 하느냐는 비판이었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죠.

다중지능이론. 이미 미국에선 1970년대에 IQ와 사회적 성공의 상관관계는 전혀 없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된 후 연구된 이론이죠. 암기력과 무관하게 사회 성공을 위한 여러가지의 지능이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우리나라가 이걸 또 IQ개념으로 받아들여 수치화하는 장사를 학자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교육학이 망하는 이유가 바로 상업화이지요. 학문하는 사람이 상업화를 위해 이론을 왜곡시키는 것이지요.

모짜르트 음악을 들으면 기억력이 높아진다는 류의 것들이 그런 것이죠. 전혀 연관성이 없음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음에도 엉터리 실험결과만 가지고 방송에 내보내고 교육하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가장 잘못된 것이 모든 시험에서 암기력만 테스트한다는 것이지요. 언어, 문학시험을 본다는 것 자체가 주류사회의 해석론을 가장 잘 암기하는자에게 인센티브를 주어서 비주류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고, 진입장벽을 높임으로써 자기들만의 제한경쟁의 리그를 만들고 나머지는 도퇴시키는 것이지요.

경쟁을 말하는 사람일수록 일단 특정 권위를 가지면, 즉, 학벌, 인맥, 지연 등을 가지면 무조건 믿고, 그것이 아니면 아무리 옳은 얘길해도 불신의 장벽을 말하며, 도대체 사람을 믿을 수 없는데 권위가 아니면 무엇으로 믿느냐는 엉뚱한 궤변을 늘어놓지요.

근거들이 타당한가를 검토하고, 그 주장을 검증하는 것이 기본적인 토론자세이고, 민주시민의 양식인데 말이지요. 그 사람의 과거나 배경을 보고 “팥으로 된장을 쓴다고 해도 믿는다. 법없이도 살 사람.”이란 속담이 니 말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못믿겠다.”란 속담 역시 이런 우리 문화속 비합리서응 나타내는 것이지요.

맹자의 혁명, 공자의 불치하문… 등등 유학의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신뢰, 불신의 비합리성은 결국 주관저 경험론을 맹신하고, 카리스마를 지닌, 영웅을 찾는 우리 문화속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집단지성이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주권자인 국민개개인으로써의 역할은 하지 않은채 귀찮은 일을 대신해주고 비판받아줄 희생양, 영웅을 대권후보로 찾고 있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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